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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독후감

『클루지』

역행자에서 추천한 책이라서 읽어보았다. 
역행자 책에서 말하는 자의식 해체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특히 수많은 사례들을 알려줌으로써 내 클루지를 쉽게 알아차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클루지(Kluge)란 급조된 방식으로 만들어져 복잡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일단 당장은 작동하는 구조나 시스템을 뜻한다.
 
우리 몸에도 사랑니, 망막 같은 클루지가 있다. 개발 분야에 비유하자면 개발 초기부터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새로운 기능들이 덕지덕지 붙은 스파게티 코드 같은 것을 말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뇌도 클루지라는 것이다.
 
클루지라는 것은 최종적인 물체나 상태 자체를 말하지만 여기서부터는 그냥 남용할 것이다. 대충 알아듣길 바란다.
 
우리의 뇌는 크게 전뇌, 중뇌, 후뇌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아래의 후뇌는 '파충류 뇌'라고도 하며 생명 유지, 자동 반사 등 무의식보다 더 아래에 있는 것을 담당한다.
중뇌는 '감정의 뇌'로, 진화 과정에서 말 그대로 후뇌 위에 '얹혔다.'
전뇌는 논리적 추론, 충동 억제 등 이성을 담당하며 중뇌에 얹혔다.
 
우리는 왜 게임, SNS, 과한 성욕 등이 장기적으로 손해임을 알면서도, 끊어야 함을 알면서도 계속하게 될까?
우리는 왜 매사에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인지 부조화, 자기 합리화, 확증 편향의 노예가 되는 걸까?
 
후뇌와 중뇌를 통하지 않고는 전뇌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계를 설계하듯이 진화하지 않았다. 스파게티 코드처럼 그때그때 생존하기 위해 낡은 시스템에 새로운 기능을 덕지덕지 붙여나간 결과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위협을 느끼거나, 시간이 없거나, 피곤하거나) 더 아래쪽 뇌를 사용한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컴퓨터처럼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이 책에서는 기억, 신념, 선택, 언어, 행복, 정신병 등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클루지(아래쪽 뇌들)가 영향을 주고 있는지 설명한다.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전뇌가 아닌 클루지에 의존하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솔직히 논리적 판단이 아닌 모든 생각을 클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Put the block in the box on the table in the kitchen.
 
이 문장을 보고 무려 4가지의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우리는 헷갈리지 않는다. 전뇌가 개입할 틈도 없이 클루지가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클루지를 없앨 수 있을까?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방법은 없다.
 
유일한 방법은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이나 드는 감정이 클루지인지 아닌지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그것만 해도 엄청나게 효과적이다. 이 책을 읽은 오늘만 하더라도 내 생각에 '클루지'라는 라벨을 붙이기 시작하니 의사 결정이 훨씬 더 명확해졌다. 물론 감정과 다른 판단을 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은 내 몫이지만 말이다.
 
사실 마음 챙김이니, 좌선이니 하는 것도 결국 클루지를 알아차림과 똑같은 것 같다.
 
설득이라는 것도 결국, 전뇌가 아닌 클루지를 공략하는 방법일 뿐이다.
 
클루지를 공략하여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기 자신의 클루지를 파악하여 미리 대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