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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독후감

어느 요기의 자서전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독후감을 쓰려고 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선(禪) 사상에 심취했다. 구루('스승'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영적 수행의 스승'을 의미한다.)를 만나기 위해 인도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며 평생 동안 꾸준히 명상을 했다. 그는 명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서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잠재우려 애쓰면 더욱더 산란해질 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속 불안의 파도는 점차 잦아들고, 그러면 보다 미묘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직관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며 현재에 보다 충실하게 됩니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고 현재의 순간이 한없이 확장되는 게 느껴집니다. 또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는 밝은 눈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수양이며,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논리적 사고뿐만이 아닌 직관의 힘을 믿었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예술가에 더 가까웠으며, 그것은 '논리적 사고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그러한 사람의 예로는 라이벌이었던 빌 게이츠가 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지력을 사용하지 않지요. 그 대신 그들은 직관력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관력은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보다 훨씬 수준이 높습니다. 제가 보기에 직관에는 대단히 강력한 힘이 있으며 지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 깨달음은 제가 일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느 요기의 자서전』은 죽기 전 그의 아이패드에 저장되어 있던 유일한 책, 그가 평생 동안 매년 읽은 책, 그의 장례식에서 지인들에게 나눠준 책이다. 잡스 전기의 독후감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했다. 그는 과연 이 책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그는 왜 이 책을 그렇게나 많이 읽었을까?

책을 읽기 전까지는 여자인 줄 알았다;;

 


어느 요기의 자서전

이 책은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자서전이다. 본명은 아니고, 수행자로서의 이름이다. 기독교의 세례명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요기'는 '요가 수행자'를 뜻하며, '요가'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요가는 신체적 수행과 정신적 수행으로 나뉘는데, 우리가 아는 운동으로서의 요가는 사실 이 신체적 수행의 일종이다. 이 책에서는 정신적 수행인 명상을 주로 다룬다.) 
 
요가난다를 간단히 설명하면, 인도에서 구루와 성자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서양에 '크리야 요가'를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가 중시한 것은 2가지인데, 바로 물질적 번영을 이룬 서양과 영적인 번영을 이룬 동양의 교류, 그리고 범종교적 화합이다. 서양에서는 꽤 유명한 것 같다. "서양 요가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등 요가난다의 영향을 받은 유명인들도 많다고 한다.
 
그는 모든 종교의 본질은 같다고 보았다. 바로 '요가 수행'이다. 그리고 종교를 초월한 수행으로 특별한 명상법인 크리야 요가를 할 것을 강조한다.

크리야 요가의 과학은 영원하다. 그것은 수학과 같은 진리다. 더하기 빼기의 간단한 규칙과 마찬가지로 크리야의 법칙은 결코 파괴할 수 없다. 수학에 관한 책을 모두 불태워 재로 만들더라도 논리적인 정신은 언제든지 그 진리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요가에 관한 책을 모두 금하더라도 때가 되면 순수한 헌신으로 순수한 지식을 터득한 현자가 나타나 그 근본 원리를 다시 밝혀낼 것이다.
신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한 상태에서 황토색 승복을 걸치면 사회에 누를 끼치게 된다. 외적인 상징에 집착하지 마라. 겉치레는 그릇된 자만심을 불러 스스로에게 해가 될 수 있다. 매일매일 꾸준히 영적 진보를 이루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한마음으로 크리야 요가를 수행해라.
영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크리야 요가를 수행하고 매일같이 도덕규범을 따르며, "신이여,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외칠 수만 있으면 충분하다.
예로부터 전해 온 계시를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깨닫고자 애쓰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모든 문제는 명상을 통해서 해결해라. 쓸데없는 공리공론을 멀리하고 신과 실제적인 교감을 이루는 데 힘써라.

 
유의할 점은, 크리야 요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다. 명상을 위한 명상을 하면 안 된다. 요가의 목적은 언제나 '신과의 합일'이다. 
 
신과의 합일이 도대체 뭘까? 힌두교에서는, 신이 모든 영혼에 편재해 있으며 요가(명상)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실재(實在)인 영혼과 교감하여 신과 인간이 하나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더 자세히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무슨 X소리야?" 하면서 나가버릴 수도 있다. 사실 이 책의 최대 단점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요가난다는 첫 페이지부터 자기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또 오랜 기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은 불치병을 고치고, 나이를 먹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고, 공중부양을 하고, 분신을 만들어 여러 곳에서 존재하는 등 말도 안 되는 기적을 행하며 요가난다 자신이 직접 보았다고 증언한다. 멀리 있는 사람의 눈앞에 환각으로 나타나 말을 전하는 것은 무슨 전화통화를 하는 것처럼 흔하게 나와서 나중에는 읽는 나조차도 당연하게 느껴졌을 정도다.
 
또 다른 단점은 요가를 자꾸 과학과 접목하려 한다는 것이다. 요가난다는 아인슈타인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그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는 원자폭탄이 발명되는 등 미시 세계에 대한 연구가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그 역시 이런 인류의 위대한 발견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가 자꾸 요가를 과학적으로 타당한 것처럼 설명하려고 한다. 참... 물리학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원자를 들먹이면서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음... 노력은 가상하지만...

메롱

 


요가의 의미

나는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책을 덮어버리지는 않았다. 이 책 속에는 분명히 조개 속의 진주 같은 내용이 있으며 나 또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크리야 요가의 핵심은 자신이 육체나 자아가 아니라 편재하는 영혼임을 깨닫는 것이다.

크리야 요가의 수행법 중

 
우리의 실재는 영혼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잠시 부여받은 껍데기일 뿐이다. 그림자 연극을 생각해 보자. 우리의 몸과 마음인 그림자는 실재하지 않으며,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영혼은 그대로인 채 새로운 육체로 계속해서 윤회하는 우리들은 빛의 방향에 따라 다른 형체가 나타나는 그림자와 같다. 

 
우리의 실재가 영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세속적 욕망'을 분리하고 진정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또한 '물질적 쾌락'이 아니라 오로지 신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세속적 쾌락에 금방 싫증을 낸다. 물질에 대한 욕구는 한이 없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또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 그네들이 찾는 '다른 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만이 영원한 기쁨을 줄 수 있다.
치유의 땅은 내면에 놓여 있다. 이곳에는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정처 없이 찾아 헤매는 행복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이 책에서 내가 찾은 '진주'는 바로 '내면의 힘'이다. 어떤 고민이 있을 때, 사실 정말로 각 선택의 가치나 선호도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럴 때는 법륜스님의 말마따나 그냥 아무거나 택해도 상관없고, 그래도 별로 후회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우리를 고민하고 후회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한 선택지의 선호가 명확한데 결과가 좋지 않을까 봐 두려워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고백, 이직 등). 요가를 통해 번뇌를 떨치고 영혼의 명령에 의해서만 판단을 내리고 실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종교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신의 축복이 있을 거라는 믿음은 큰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수행이 깊은 크리야 요기의 삶은 과거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영혼의 명령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일상의 삶을 끝없이 감시하는 눈, 독수리의 마음에는 달팽이처럼 느리고 거추장스러운 진화의 현실을 비껴갈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천박한 에고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각하고 바라고 느끼고 음식을 소화시키고 목숨을 유지하는 주체는 당연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조그마한 반성도 없이, 일상적인 삶을 이끌어가는 자신이 과거 행동(카르마)과 자연환경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 세상의 경전들은 하나같이 인간이란 언젠가 썩어 없어질 육체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 있는 영혼이라고 가르친다. 참된 요기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육체적 욕망과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신의 계획에 따라 이 세상의 삶을 누린다. 과거에서 비롯된 충동도, 인간의 무분별이 일으키는 새로운 자극도 그를 흔들 수 없다. 지고한 욕구의 충족을 이룬 그는 가없는 행복이 넘치는 영의 마지막 안식처에 영원히 머문다.
인간은 자신이 한 일을 되돌릴 수 있다. 지금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어떤 결과이든 그 원인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인간은 어떤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한계 자체가 처음부터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크리야 요가의 보편성

책에서는 크리야 요가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산속에서 틀어박혀서 고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세속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크리야라고 하는 실천적 방법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성한 깨달음을 위한 과학적 기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요기라고 할 수 있다. 요기는 결혼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세속의 의무를 따르는 사람이거나 종교 단체에 속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기적인 욕망을 떨쳐 버리고 신의 도구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세속적인 의무를 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 감정과 사고의 통제, 신을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 집중의 위대한 힘을 체현하고 있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통제라는 요가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요가난다도 원래는 속세를 등지고 히말라야 산맥에 은둔한 채 수행에 매진하는 이상적인 성자들의 삶을 동경했다. 학창 시절에 히말라야에 가겠다며 가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성자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현인들은 산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지 않는다네. 히말라야는 성자들을 독점하지 않아. 내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몸을 이곳저곳 옮겨 다닌다고 찾아지는 것은 아닐세.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가까운 곳에서 구루가 나타난다네. 문을 닫고 혼자 지낼 작은 방을 구할 수 있겠나?"

"네"

"그것이 자네의 동굴일세. 그것이 자네의 성스러운 산일세. 그것이 자네가 신의 왕국을 찾게 될 곳일세."

성자의 단순한 얘기를 듣는 순간, 히말라야에 대해 내가 일생 동안 간직해 온 잡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타는 듯한 논 위에서 나는 산과 만년설의 꿈에서 깨어났다.

히말라야

 


후기

나는 영적인 힘, 내면의 힘 그리고 인문학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 중 과학적, 기술적 혁신을 이루지 않은 사람은 석가모니 밖에 없었다. (내가 불교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자기 수행의 일종으로 본다.) 
 
요가난다는 간디와도 교류했다. 나는 사실 간디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위대한 발견을 한 것도 아니고, 위대한 혁신을 이룬 것도 아니고, 그냥 시민운동을 한 것뿐이잖아?라고 생각했었다. 또 간디가 사적으로 논란이 적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간디는 사랑의 힘을 믿었으며, 인도의 독립뿐만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싸웠다. 비폭력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룬다면 그 성공을 토대로 전 세계의 폭력에 대한 인식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암살범에게 총알을 맞고 죽어가면서도 그는 힌두교의 전통적인 몸짓으로 용서를 표했다. 간디는 실제로 마틴 루터 킹, 넬슨 만델라 등 많은 사회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위대한 과학적 발견, 발명만큼이나 인류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힌두 경전 중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 (거룩한 자의 노래)는 간디에게 삶의 지침서였다. 나무위키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기타가 놀라운 작품인 이유는 아주 간단한 고민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한다는 겁니다. 바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은 것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근거로 선택을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느 요기의 자서전』을 읽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아주 먼 길을 돌아서 드디어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였던 이유는 이것이었을까? 나는 책을 보통 사람들보다 많이 읽음에도 내심 인문학을 경시했다. 나에게는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읽을 책은 바가바드 기타』로 정했다.

여담으로 오펜하이머의 유명한 말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는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대사다.
 
크리야 요가의 수행법은 반드시 요기를 통해 전수받아야 한다는 규율이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그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방법들이 요가난다가 전수한 것과 똑같은 방법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다. Self Realization Fellowship에 연락하면 정식으로 크리야 요가를 전수받을 수 있다. 
 
 

진리는 과학 이론도, 철학의 사변 체계도, 지적인 통찰도 아니다. 진리는 실재와의 정확한 합치다.
인간에게 진리는 자신의 참된 본성, 영혼으로서의 참나에 대한 확고한 앎이다.
예수는 모든 말과 행동을 통해 자기 존재의 뿌리가 신에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편재하는 그리스도 의식과 완전히 합치된 그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부처 역시 형이상학적 근본 원리를 밝히려 하지 않고, 인간이 이승에 머무는 짧은 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만드는 방법은 덕을 갈고닦는 것이라고 했을 뿐이다.
중국의 신비가 노자는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신의 궁극적 신비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신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인간이 인간에게 전해 줄 수 없으며 오직 신만이 가르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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