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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독후감

『바가바드 기타』에서 배운 것

1편: 『바가바드 기타』 소개

2편: 『바가바드 기타』에서 배운 것


메모를 구절 + 주석의 형태로 작성하고, 독후감은 이 글의 맨 뒤에 적겠음.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주석은 머릿말을 붙이고 머릿말이 없는 주석은 내 의견임.

 

예시:

한 가지 간단한 사실을 발견하면 삶은 훨씬 더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이 당신보다 더 똑똑하지도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바꿀 수 있고,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당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 당신은 다시는 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 Tim Urban: 잡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를지 몰라도,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당신 눈에는 임금이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면, 자신의 눈을 믿어라. 당신이 모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모른다." 

이 메시지는 이해하기는 쉽지만, 믿기는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 스티브 잡스의 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오, 크리슈나, 이들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을 죽이고 무슨 쾌락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비록 흉악범이기는 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 라다크리슈난: 아르주나는 사회 일반적으로 하는 도덕이나 풍속에 따라 할 뿐이지 개인적인 참에 대한 확신으로 하는 것이 못 된다. 그는 이러한 외적 도덕의 상징을 죽이고 내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가 혼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때까지 그이 인생을 지도해 주었던 전날의 스승들을 죽여버려야 한다.

 

   ↪ 의도한 건 아닌데 위에 잡스의 말과 비슷하다.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확신에 따라 움직여라.

 

 

쾌락 고통을, 이득 손실을, 승리 패배를 하나로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어라. 그리하면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달리지기를 바라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지지 말고,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감정의 희생이 되지 말고, 우리의 놓인 상황에 의해서 우리에게 지워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내 생명과 재물과 명예와 자녀와 아내를 다 뺏어간들,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모든 것은 다 사라질 것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제 참 목적이 무엇임을 알고 거기다가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사람,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다른 모든 것을 빼앗겨버리고 헐벗고 주린 몸으로 홀로 거리를 걸을지라도, 비록 하나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눈동자 속에서 이해해 주는 빛을 찾아볼 수 있는 눈이 전혀 없을지라도,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제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속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 일론 머스크는 이런 말을 했다. "무언가 충분히 중요하다면, 확률이 유리하지 않더라도 시작하라." 

이 말은 한 인터뷰에서 나왔는데, 진행자는 테슬라가 90년 만에 미국에서 자동차 스타트업으로 성공했다며 그 사업이 성공할 것을 어떻게 알고 시작했는지 물었다. 머스크는 자신도 거의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패할지라도 전기차가 못생기고 느리고 지루하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꿔주고 싶었다면서 위와 같은 말을 했다. 더 파고들어 가면 그것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서이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였다. 

 

 

아르주나야, 여기서는 결정적인 태도가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결정적이 되지 못하는 생각이란 가지가 많고 끝이 없는 법이다. 

↪ 라다크리슈난: 인생의 실현은 거룩한 계명이 지시해 주는 목적에 대해 자기를 온전히 바침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무한한 가능성들을 무턱대고 추구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점에만 집중하는 것은 수양해서만 가능하다.

 

   ↪ 선택과 집중.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던 스티브 잡스도 평생 동안 명상을 꾸준히 했다.

 

 

사람이 감각의 대상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거기 대한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애욕이 일어나고 애욕에서 분노가 나온다.

↪ 뭐든지 많이 보면 집착이 생긴다. 생각도 그렇다. 뭐든지 많이 생각하면 집착이 생긴다. 그렇다고 어떤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오히려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해야 할 일을 의식적으로 들여다보거나 계속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오, 아르주나야, 내게는 이 삼계 속에서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아무 일도 없고, 또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만일 일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언제나 나 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

↪ 요한복음 5:17 - 내 아버지께서 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입니다. 

 

↪ 마하데브 데자이: 사람이 애착의 맛에서 물러설 때 모든 일의 멍에는 편하고 모든 짐은 가벼운 것이 돼버린다. 마치 지구의 인력이 없어질 때 몸이 그 무게를 잃는 것과 같다.

 

   ↪ 불교의 격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고통이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제 의무를 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 낫다.
제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니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 뿐이다.

↪ 함석헌: 아무리 진리라도 제가 몸소 해서 얻지 못하고 남의 한 것을 모방만 해서는 참 자유하는 즐거운 지경에 이를 수 없다. 내가 참 하고 싶어서 하면 십자가를 져도 즐겁지만, 좋다고 하기 때문에 남을 따라서 하려면 마침내는 천당엘 간다고 해도 무섭고 괴로울 것이다. 확신이 없으므로, 무엇이 어떻게 되나, 어디로 가는 건가, 그러다 잘못되면, 하는 불안이 늘 있기 때문이다.

 

↪ 일론 머스크 왈, "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을 끝내기 위해 회사를 만든다."

 

 

지혜는 여기 싸여 있다. 이 어진 이의 영원한 대적, 애욕의 형상을 쓰고 있으면서 영원히 배부를 줄 모르는 불에 말이다.

↪ 마누: 욕망은 욕망의 대상을 즐김으로써 만족되는 법이 없다. 불에 장작을 더하면 더할수록 불길이 더 서듯이 점점 더해 갈 뿐이다.

 

   ↪ 이거 진짜 공감.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명상을 하거나 다른 일에 신경을 집중해 보자.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성공 실패를 하나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 부분이 왜 이렇게 좋지? 돈과 권력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히 좋은 일을 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을 직접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더 큰 비전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 이상적이다. 아니, 정말로 진실하다면 얻을 수밖에 없다. 머스크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는 자신이 리더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휴식 시간, 다음 내용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멍때려보세요.

 

 

 

하고자 하는 뜻을 일으키는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내버리고 마음만으로 모든 감각의 무리를 샅샅이 정복하며,
꾸준한 인내로써 버티는 이성에 의해 한걸음 한걸음 안정에 들어갈지어다.
마음을 자아에 박아놓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 요기 마하리시 마헤슈: 꾸준히라는 말과 점진적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조급해져 가지고 그 초월 속에다가 내 마음을 몰아넣으려 하다가는 여러 가지 잘못이 일어남을 보게 된다.

 

초월적인 의식의 지경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경 저쪽에 있다. 아무리 그 지경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되지 않고, 거기는 다만 거기 있음을 즐길 수 있을 뿐인 지경이다. 거기는 생각이 제자리를 가질 수 있는 정도의 지경이 아니다. 거기 어떤 좋은 생각이 들어올 수 있으려니 기대하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크리슈나는 수도자에게 이 말을 해준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이것은 명상하는 동안에만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버릇이 되면 생활은 침체되고 무의미한 것이 돼 버린다.

 

↪ 아무 생각하지 마라.

 

 

요가를 닦는 자는 언제나 자기를 통일하여 죄를 벗어버렸으므로 쉬이 브라만과 접촉하는 영원한 복을 얻을 수 있느니라.

↪ 라다크리슈난: 종교는 입씨름이 아니요 체험되는 사실이다. 이성은 거기 입을 내밀어 사실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인 설명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굳건한 기반 위에 서지 않는 이상 설명은 아무 의미가 없다.

 

↪ 요기 마하리시 마헤슈: 요가 경전의 말을 오해하는 것은 요가 상태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과 요가를 닦는 데 대한 자세한 지식이 없는 데서 온다. 이 상태에서는 오해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 마음이 가지가지 물욕으로 인해 비틀린 것들은 각각 제 성질에 이끌려 제각기 제 나름의 의식을 지키며, 다른 신들을 섬기느니라.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케 해 준다.

그러한 신앙이 주어짐을 얻어 그는 특정한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고, 그리 함으로 말미암아 제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그러나 사실 그 이득은 나만이 주는 것이니라.

그러나 그러한 적은 지혜의 사람들이 얻은 결과는 유한하고 잠깐인 것이니라,
천신들을 공경하는 자들은 천신의 하늘로 갈 것이지만 나의 신자는 내게로 온다.

↪ 스와미 부라부파다: 여러 신들의 공경자들은 낮고 작은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구경의 지경을 지향할 줄을 모른다. 다만 최고의 주재자를 믿는 자만이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없다.

 

↪ 라다크리슈난: 우리가 존경하는 것이 무엇이었든 간, 그 존경이 진지한 것이기만 하다면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예배의 결과는 예배하는 대상 속에 녹아듦인데, 유한한 대상이면 유한한 결과를 줄 수밖에 없다.

 

↪ 틸라크: 여러 신들이나 조상들이나 지도자, 나그네, 브라만들, 암소 등을 섬기는 사람들도 간접으로는 오직 비슈누만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 함석헌: 여러 신이요, 천신이요, 천신의 하늘이요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우주의 어느 구석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자라는 정신세계의 어느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지음을 받은 자가 어찌 지은 자에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할 수 있느냐? - 로마서 9장 20절

↪ 그냥 마음에 들었다.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라. 그리하여 네 영광을 얻을지어다. 네 대적을 정복하고 풍성한 왕국을 누릴지어다.
그들은 이미 나에 의하여 부서졌느니라. 아르주나야, 너는 다만 그 잡은 것이 돼라.

드로나 장군, 비슈마 장군, 그 밖의 용사들도 이미 나에 의하여 죽여졌느니라.
너는 그들을 죽여라! 겁내지 마라! 싸워라! 너는 싸움에서 대적을 정복할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당신의 뜻대로 될지어다"가 모든 일에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 간디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네가 만일 참에 대한 맹세를 지키려 한다면 두려움은 필연적으로 없어질 것이다."

 

 

죄를 끄고, 의심을 끊고, 마음을 다듬어 모든 산 것에 대해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성자는 브라마니르바나에 이르느니라.

모든 감각을 다스리고, 어떤 경위에 처해서도 평등한 마음을 가지며, 모든 생류의 안녕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내게로 올 것이니라.

↪ 라다크리슈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에게 육체적 쾌락을 주는 것도 생활을 향상시켜 주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진성을 발견하여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아트마 아우파먀(자아로서 봄)는 나와 다른 사람을 평등으로 본다는 뜻이다. 내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듯 모든 것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봉사가 정진에 근본적 필요조건인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독후감

기타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은 매우 비슷하다. 

 

둘의 다른 점은 불교는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강조하는 데 반해, 기타는 그들에게서 벗어나서 '행동할 것'을 강조한다.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행동하는 것', 이 "무행위"가 기타의 핵심이다.

 

그 모든 경영은 욕망과 야욕을 떠났으며,
그 모든 행위는 지혜의 불로 살라져 버린 바 된 그 사람을 지혜 있는 자들은 어진 이라 불렀느니라.

행위의 결과에 집착함 없이 언제나 족한 줄을 알고, 어떤 것에도 의뢰하지 않으면,
아무리 행위 속에 빠져 있어도 그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느니라.

아무 바람 없이 자아와 마음을 제어하고,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 다만 몸으로만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함이 없느니라.

- 4: 19 ~ 21 -

 

오늘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싫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것들을 처리하기가 너무 막막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싶은데, 침대에 박혀서 핸드폰만 보고 있기는 너무나 싫은데, 게으름이라는 탈을 쓴 두려움이 내 몸을 짓눌렀다. 

 

요즘 많이 듣는 노래인 칸예 웨스트의 Runaway를 틀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책상에 앉았다. 

 

나는 생각이 많은 타입이다. 생각이 너무나도 넘쳐서, 행동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는다. 그것을 해결하는 데는 음악이 참 좋은 것 같다. 좋아하는 노래를 무한 반복으로 틀어놓으면 무행위에 가까워질 수 있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

 

Runaway

 

 

신에 대해서.

 

스티브 잡스는 어느 요기의 자서전』을 평생 동안 매년 읽었다고 한다. 저 책에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다. 그가 신의 존재를 믿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인도에 순례를 떠나기도 했고, 거기서 구루(스승)를 찾아다니기도 했으며, 평생 동안 명상을 실천하기도 했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사실 그가 어린 시절에 빠진 것은 『어느 요기의 자서전』에서 강조하는 크리야 요가가 아니라 선(禪) 사상이었으며, 그의 구루였던 오토가와 고분 또한 승려였다. 그런데 왜 그의 아이패드에 저장되어 있던 유일한 책은 『선심초심』이 아니라 『어느 요기의 자서전』이었던 걸까? 

 

『어느 요기의 자서전』의 저자인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모든 종교의 본질은 같다고 보고 범종교적 수행법인 크리야 요가를 예찬했다. 그러니까, 신이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인격신을 굳이 숭배하지 않아도, 아트만은 브라흐만이다. 신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명상이다.

 

함석헌의 이 주석 - 여러 신이요, 천신이요, 천신의 하늘이요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우주의 어느 구석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자라는 정신세계의 어느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 이 나의 많은 의문을 해소에 주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방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으로 종교를 믿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당연히 나쁜 것도, 틀린 것도 아니다. 기타에서도 헌신의 길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방식으로 종교를 믿을 수는 없었다. 내 안에 깊이 뿌리 박힌 무의식이 인격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교인 내가 종교 중 불교를 가장 고평가 했던 것도 타의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내면의 신을 가리고 있는 망상과 집착들을 불살라버기 위함이다.

 

결국 신에 대한 믿음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요, 신에 대한 앎은 나에 대한 앎이요, 신이 아니라 스스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비밀 중의 비밀인 지혜를 나는 너에게 말했으니,
깊이깊이 생각한 후 네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크리슈나와 아르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