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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책

The Art of The Deal (거래의 기술) 2부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트럼프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 거래의 신인 것 같다.

물론 내용의 대부분을 공저자가 썼다는 의혹이 있기도 하고 그의 성격 상 완전히 솔직하게 썼을 것 같지도 않지만,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그저 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치밀하고 예술적인 거래 능력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성장

트럼프 아빠도 지독한 일벌레에 비범함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을 잘하게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는 단 1달러의 가치도 소중히 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며, 열심히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게끔 교육받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항상 주위에서 리더로 군림했다. 

지금은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해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든 말든 리더가 되려고 한다.

 

사건을 일으켜서 남들을 시험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청부업자들을 독려하고 자재공급업자들과 열심히 상담을 벌인 덕분에 날짜를 예정보다 단축했을 뿐 아니라 건축비도 100만 달러나 절약했다.

프레드 트럼프


신시내티 촌놈 부동산에 눈뜨다

상황 자체가 너무 사기다. 
일단 최고 명문대인 와튼 스쿨 출신에 대대로 사업가인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투쟁심과 공격성이 강했다.
게다가 부동산 사업가 출신 아버지 덕분에 이미 부동산에 능통했고 정치권에 연줄이 있었다.


스위프튼 빌리지

대학 시절에 친구들이 신문 만화나 스포츠 기사를 읽을 때 나는 연방 주택관리국의 저당권 상실 명단을 살펴보곤 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스위프튼 빌리지를 찾아냈고, 나는 대학 재학 중 아버지와 함께 그 건물을 사들였다.

스위프튼 빌리지를 600만 달러에 구입하고 그 건물을 저당 잡혀서 사실상 돈 한 푼 안 쓰고 아파트를 샀다.


불량 입주자들을 쫓아내고 좋은 입주자들을 들이고 시설을 청소하고 개선하여 더 높은 가격에 임대료를 받아 돈을 벌었다.

차를 팔고 싶을 때 5달러를 들여 광을 내고 반질반질하게 만들면 400달러를 더 받을 수 있다.
신시내티에서는 부동산 광고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였지만 신문 광고를 냈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사람들의 능력을 재빨리 간파했기 때문에 둔한 사람들을 장기간 채용하지 않았다.
어빙은 내가 만난 사람 중 최고의 허풍쟁이였고 하루에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12시간을 일하는 사람보다 성과가 좋았다.
나는 그로부터 얼마나 오래 일하는가 보다는 일함으로써 무엇을 얻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자주 돈을 빼돌렸다. 그러나 그는 다른 관리자들보다 훨씬 유능했고, 그가 책임을 맡으면 아무도 훔칠 생각을 못했다. 
이 말은 어빙을 감시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를 고용하는 것이 그가 빼돌리는 돈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종종 "5만 달러와 당신이 빼돌리는 돈을 보수로 지급하는 셈이오"라고 농담했다. 아마 그는 당황했을 것이다.

 

그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입심이 셌다. 
한 번은 그가 임대료를 내지 않은 입주자의 아내에게 추근댔다. 거구인 그녀의 남편이 살의에 번뜩이며 그를 찾아왔는데, 65살에 작은 체구의 어빙은 오히려 삿대질을 하며 그 사내에게 호통을 쳤다. 나는 어빙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어빙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사자 조련사 같은 데가 있었다. 약점이나 두려운 기색을 눈치챘을 때 사자가 조련사를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조련사가 채찍을 휘두르며 당당하게 접근하면 사자는 놀랍게도 그의 말을 듣는다. 똑같은 상황이 어빙과 그 사내 사이에서 벌어졌다. 어빙은 호기를 보임으로써 목숨을 건졌고 그 사건은 내게 생생한 감동을 주었다. 여러분도 겁낼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당신의 자리에서 당당히 일을 하면 된다.

어빙이 일을 잘했으므로 나는 그 아파트에서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어졌고,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들렀다.


"도널드, 친구니까 하는 말이지만 이 아파트를 팔아야 되겠어. 사업은 괜찮지만 주변 지역이 점점 나빠지기 때문이야.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당신 사업이 머지않아 큰 피해를 입게 될 거야. 그들은 남이 망하는 것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이지."
그의 표현은 정확했고, 나는 그 말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존경하는 사람들의 말은 따르고 있지만 당시에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판단은 시장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 따른 결과였다.

아파트의 원매자는 어떤 부동산 투자회사였다. 당시 그런 회사를 경영하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사업 수완이 없었다. 
그들은 가보지도 않은 푸에르토리코에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보낸 젊은 남자와 나는 그가 가고 싶어 했던 식당에서 3시간에 걸쳐 식사를 했다. 내 방식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만약 내가 이번 건과 같은 큰 거래를 살피기 위해 하루밖에 시간이 없었다면 식사도 거른 채 하루 종일 구입할 물건에 대해 알아보려고 질문했을 것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레 클럽

맨해튼에 방을 구한 후 내가 했던 첫 번째 일은 성공한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성들이 드나드는 배타적인 클럽인 레 클럽 (Le Club)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레 클럽에 전화를 걸어 "제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입니다. 클럽에 가입하고 싶은데요."라고 말했더니 전화가 끊겼다.

다음 날에는 "회원 명부를 볼 수 없을까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요."라고 말했더니 상대방은 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다음 날에는 "클럽의 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보내드릴 것이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회장의 사무실 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입니다. 레 클럽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클럽에 친구나 가족이 있소?"
"아뇨,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회원이 되려는 생각을 하게 됐소?"
내가 얘기를 하고 또 하자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한마디 하겠소. 내가 보건대 당신은 멋진 젊은이인 것 같구려. 젊은 회원을 몇 사람 두는 것도 좋겠지. 내일 밤 21번가에서 한잔하지 않겠소?"
다음 날 우리는 만났지만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두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 그 뒤로 2주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내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레 클럽은 사회적으로 나에게 큰 전환기가 되었다. 뉴욕이라는 곳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배울 수 있었으며, 뜻하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 거래를 틀 수 있었다. 로이 콘을 처음 만난 것도 여기서였다. 

 

그와 잠시 얘기를 나누다 그에게 도전을 했다. 나는 사실 사람들을 시험하길 좋아한다.
변호사들을 욕하며 은근슬쩍 자기가 소송 중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로이의 반응을 본 후 그 소송에 대한 적임자라는 생각을 굳혔다. 

(진짜 난 놈인 듯)

 

나는 굽히기보다는 차라리 싸우겠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한 번 굽힐 경우 잘 굽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나기 때문이죠.

 

로이 콘은 진실로 신뢰할 수 있는 인간, 친구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에도 혼자 남아 임종을 지켜볼 그런 위인이었다.


웨스트 사이드

맨해튼에 온 지 꽤 됐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는 그런 부동산은 찾을 수 없었다.

주택 건설 보조금 중단 + 금리 인상 + 건설 비용 인상 + 뉴욕 시의 부채로 뉴욕의 부동산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도시가 파산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오히려 좋은 기회로 보았다. 나는 퀸스에서 자랐기 때문에 맨해튼이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을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믿고 있었다. 결국에 상황이 반전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73년 여름 어느 날, 파산한 회사들에 관한 방대한 서류철 중간에서 '펜센트럴 레일로드'라고 하는 한 철도회사에 관한 신문기사 한 편을 우연히 찾아냈다. 기사의 내용은 그들이 자산 처분을 위해 빅터 팔미에리라는 사람이 대표로 있는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의 자산 중에는 눈여겨보고 있었던 방치된 철도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위프튼 빌리지도 취미로 저당권 상실 명단을 살펴보다가 발견한 것이다. 그를 보면 항상 하이에나처럼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기회주의자의 면모가 보인다. 

 

나는 그의 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내 이름을 소개하고 철도 부지를 사고 싶다고 말했다. 가장 단순한 접근이 때로는 가장 효과적인 경우가 있다. 그들은 나의 단도직입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좋게 보았던 것 같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내 힘으로 이룬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해보려는 적극성만은 갖고 있었다.

 

그 땅이 얼마나 형편없는 땅인지를 강조하면서도 나는 그 땅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또한 그 땅을 몇 개의 구획으로 나누는 것이 법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강조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 사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에게 그가 가진 물건이 대단치 않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 대단히 유리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그에게 판 것이다. 나는 내 보잘것없는 경험과 업적을 팔 수는 없었기에 대신 나의 정력과 의욕을 팔았다.

나는 그에게 나를 너무 비싸게 팔았는지도 모른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 당시 27살이었고, 맨해튼에 아무것도 세워본 적이 없었다. 우리 회사가 크고 막강하다고 그가 믿도록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그가 나의 말에 따라줬을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공식적인 회사 이름조차 없었다. 회사가 대단히 크다는 인상을 풍기기 위해 Trump Organization이라고 둘러댔다.

 

빅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홀에 불과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 땅에 흥미를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무엇을 추진하려 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 젊은 친구 트럼프는 잘해왔다. 그는 마치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19세기로 되돌아간 사람 같았다. 그는 실제보다 그릇이 더 큰 인물이다."

 

"트럼프는 대단히 허풍을 떨고 있는데, 도대체 벽돌과 회반죽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비아냥댄 거물급 부동산업자에게 화가 나서 1년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웨스트 사이드 개발 당시 뉴욕 시는 건축업자들에게 낮은 이자로 장기 담보 융자를 해주고 있었으며 세금 감면까지 베풀고 있었다.
흐름을 잘 타야 함. 근데 뉴욕 시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컨벤션 센터를 짓기로 했다. (옵션 극대화)

 

나의 계획이 공식 발표되자마자 그 부지를 사겠다는 신청자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들은 훨씬 높은 입찰금을 제시했다. 그러나 나는 그 회사가 결코 그 사업에 가까이 가지도 못할 것이며, 설사 그 사업을 따낸다고 하더라도 그 부지를 성공적으로 개발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때 이미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내가 매우 진지하고 또 약속을 지키고야 마는 성미라는 것을 팔미에리의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준 뒤였기 때문에 나의 낮은 입찰가를 고수했다.

 

나는 매우 경쟁을 좋아하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합법적인 (과연?) 테두리 내에서 거의 모든 일을 마다않고 행하는 사람이다. 

 

뉴욕 시가 44번가 지역 개발을 중단하자 그때까지 44번가 지역에서 일해 온 유능한 변호사 린덴범을 즉시 스카웃했다.
정치 인맥이 있는 루이스 선샤인 스카웃.

 

그 와중에 뉴욕 시는 다른 곳에 컨벤션센터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싸움을 벌이기를 원했지만 나는 무명인에 불과했다.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고 지지를 받으려면 우선 나에 관한 프로필은 높여야만 했다. 그래서 기자회견을 갖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뉴욕 시가 책정한 것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센터를 세울 수 있다고 말하자 언론으로부터 다소의 관심을 얻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정치인들이 비용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의 돈이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곳에 컨벤션 센터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나의 부지가 얼마나 훌륭하며, 뉴욕 시의 계획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설명했다. 

 

판매고가 줄어들 경우 대부분의 회사들은 광고비를 삭감한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이 사지 않고 있을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광고다. 나는 건물을 하나 짓는다는 것은 뉴욕 시의 이미지를 희생시키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경제까지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를 반대한 사람들 중 한 명은 부시장 콘 주코티였다. 그가 나의 부지에 대해 악평을 해댄 이유는, 언뜻 봐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곳에다 수백만 달러의 공공 자금을 쏟아 넣었고 또 그의 인생 중 적어도 몇 년을 그곳에다 허비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바로 그 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그의 결점들을 비난했다. 그와의 싸움은 언론의 상당한 관심사였으며, 오히려 나를 이롭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나의 부지의 이점들을 널리 선전해 주었다.


어쨌든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로 트럼프는 개발을 감독하지 못하고 거래 대금의 일부만 보상금으로 받은 후 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벤션 센터의 이름으로 트럼프 가문의 이름을 쓴다면 보상금을 포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일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결코 변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트럼프 가문이 없었다면 뉴욕에 새로운 컨벤션 센터는 없었을 것이다.

뉴욕 시의 지지부진한 개발로 그 공사는 엄청난 망신거리가 되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 공사의 감독을 맡겨준다면 더 이상의 경비 초과 없이 즉시 공사를 끝마치겠다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현재 그 부지에 들어서 있는 Jacob Javits Convention Center


그랜드 하얏트 호텔: 뉴욕 중심가를 부활시키다

빅터와 더욱더 친해졌고, 펜센트럴 사의 건물 중 위치는 좋지만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던 코모도어 호텔을 매입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나의 진심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훗날 아버지는 트럼프가 타이타닉 호의 좌석권을 끊으려고 싸움질하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나는 장래성을 보았고 또한 파산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위험을 극소화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금전적으로는 성과를 봤지만 거래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 갔다. 

 

빅터의 사람들에게는 죽어가는 시의 쇠퇴하는 적자 호텔을 사려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했고,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펜센트럴 사의 자산 처분을 위탁받았다)
뉴욕 시의 공무원들을 찾아가 나에게 전례 없는 세금 혜택을 주는 것이 결국은 시의 입장에서도 이익이라는 것을 설득했다. 

(일자리 창출, 상권 활성화, 이익금을 시와 나눔)
또한 은행에게 신뢰받기 위해 호텔 경영인을 구해 동업하도록 설득하고 도덕적 의무감을 자극했다.

 

위의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진다면 호텔을 매입하는 것이 이론상 가능했지만 한 가지 문제는, 운이 따라야 하는 거래에 25만 달러를 내놓기가 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들을 동원해 시비를 걸만한 법적 꼬투리라도 찾아내도록 했다. 

 

먼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근사한 설계라고 마음을 굳혔다. 

나는 완전히 새롭고 현대적인 무언가, 놀라움과 흥분으로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주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원했다. 

 

젊고 재능 있는 건축가인 데르 스쿠트와 협업했는데, 그가 일해오던 건축회사에서 해고되자 그 계획을 별로 추진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이 정도 크기의 일을 하려면 대기업의 각종 지원과 권위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데르가 새로운 기업과 제휴를 맺을 때까지 잠시 일을 중단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빨리 다른 회사와 제휴를 맺었다. 데르의 이전 회사와 데르는 둘 다 맡던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경쟁은 나에게 더 낮은 건축비를 놓고 협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며, 결국 나는 데르에게 매우 적절한 비용을 지불했다. 나는 그에게 결국에 가서는 대단한 대가를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이것은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며 또한 당신을 스타로 만들어줄 것"

 

같은 시기에 나는 호텔 경영인을 물색했다. 사실 나는 호텔 경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27살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호텔에서 잠을 자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만 평방피트에 달하는 그 괴물 같은 호텔을 사려하고 있었던 것이며, 객실 수로도 최대인 1400개의 객실을 만들겠다고 장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 호텔이 호텔 체인 중 하나에 속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전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체인이라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아닐지 몰라도 전국적인 예약 체계, 위탁 경영, 경영 기법 등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하얏트는 다른 호텔 체인들과 달리 뉴욕에 간판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요한 협상을 하려면 최고위층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협상은 허공을 맴돈다. 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고용인에 불과하다. 고용인들은 타인의 거래가 아니라 자신의 임금과 보너스를 위해서만 싸운다.

 

잠정적인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후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가 직접 프리츠커와 협상을 벌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비록 의견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맞대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유대가 강한 동업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데르의 기초 설계와 건설비용 산정이 하얏트와 동업 관계를 맺는 데 큰 도움이 됐으며, 그것은 다시 은행과 거래하는 데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은행을 찾아갈 때는 백발의 노인이자 금융 지식을 갖고 있는 부동산 중개업자 헨리 피어스와 동행했다. 은행들은 경험이 풍부한 이 노인네와 나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뉴욕 시는 우리가 금융 지원을 확보하기 전에 세금 감면 문제를 논의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은행들은 그 반대였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터무니없는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한걸음 전진으로 보았다. 퇴짜를 당하더라도 돌격 그 자체는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가정 하에 나는 일단 시로 찾아가서 전례가 없을 정도의 대폭적인 세금 감면을 요청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것은 마치 거금이 걸린 포커 게임에서 어느 누구도 막강한 패를 갖고 있지 않은 채 서로 허풍을 떠는 꼴과 같았다. 이쯤 되자 나는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협상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타임 스퀘어에 거대한 호텔을 짓기 위해 2년 동안 금융 지원을 요청해 온 어떤 회사가 그 계획을 포기하자 나는 그 사례를 예로 들면서 내가 금융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뉴욕 시가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즈음 나의 세금 감면 혜택 요구가 뉴욕의 다른 호텔업자들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3명의 시위원회 의원들은 코모도어 호텔 앞에서 협상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는 그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문제가 유권자들이나 언론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감지한 것이며 그래서 유리한 쪽으로 붙어선 것뿐이다.

 

만약 나 자신이 반대 입장이었다고 해도 아마 그들과 같은 주장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험담을 하는 데만 능했을 뿐이지 어느 누구도 코모도어를 위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분명 그들은 내가 그 부동산의 독점 매입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 덕택에 뉴욕 시는 그 문제를 꼬투리 삼지 않았다.

 

몇 개월 전에 한 시 공무원이 나더러 펜센트럴 사와의 매입권 협정의 사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협정서에는 내 서명만 있었을 뿐 펜센트럴 사의 서명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펜센트럴 사가 6일 이내에 호텔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모든 신문들의 1면에 호텔 폐점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호텔 종업원들 및 인근 상점 주인 등에 관한 기사가 가득 실렸고, 마침내 평가국은 세금 감면 혜택을 베풀어주기로 결정했다. 그 싸움은 예상 이상으로 값어치가 있었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빌딩을 세우는 대신에 단지 코모도어를 개축함으로써 수백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대대적인 개축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우리가 코모도어의 벽면을 유리로 완전히 덮어버리려는 계획을 발표한 그날부터 반대자들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옛날 모습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다. 나의 빌딩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생각을 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그것을 사랑한다.

 

극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또 다른 것은 호텔 로비였다. 뉴욕 시에 있는 대부분의 호텔 로비들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우리 호텔의 로비를 사람들이 방문해보고 싶은 명소로 만들 결심을 했다.


우리의 동업 관계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협정의 한 조항 덕택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호텔 지분 50%보다 더 값진 것처럼 생각됐다. 그것은 독점 계약 조항으로 내 허락 없이는 뉴욕의 어디에도 하얏트 측이 경쟁 호텔을 세울 수 없도록 영원히 금지한 것이다. 

 

처음 협상을 할 때 프리츠커는 당연히 거절했다. 우리는 결국 이 문제를 미결 상태로 남겨둔 채 협상의 막바지를 맞았다. 협정 체결을 위해 우리 모두가 자리를 같이하기 직전에 나는 홀로 은행에서 나온 책임자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이번 협상은 은행이 대부를 해주는 협상치고는 다소 덩치도 크고 위험 부담도 많은 것임을 우선 지적했다. 그러고 난 뒤 나는 은행의 대부금을 더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하얏트 측에 제약을 가하는 조항을 계속 고수함으로써 하얏트가 2년 뒤에 바로 42번가에다 또 다른 호텔을 짓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 은행가는 즉시 말뜻을 알아챘다. 그는 하얏트 측에서 온 사람들이 앉아 기다리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여러분, 우리 은행은 지금 수천만 달러를 투자하려 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얏트 당신네들이 더 이상 뉴욕에 어떠한 호텔도 갖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계약 조항을 협정에 삽입시켜주지 않는 한 대부를 해줄 수가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프리츠커가 그 마지막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얏트 측을 대표하고 있는 책임자는 그와 접촉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네팔로 떠나고 없었다. (일부러 그 타이밍을 노린 것 아니었을까?) 은행은 그들에게 한 시간의 여유를 주었다. 나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조그만 고급 호텔 하나를 제외하고는 (이 대목도 뭔가 ㅈㄴ 교묘함;) 하얏트 측이 뉴욕에 경쟁 호텔을 가질 수 없도록 명시한 계약문을 직접 작성했고 그들은 시간이 되기 전에 서류에 서명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