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까지 써야 될 듯...
<통일장 이론>
그동안 그는 다른 이론들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발견하는 일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왔다.
그는 전기와 자기, 중력과 양자역학을 함께 묶어서 우주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을 찾아내기 위한 외로운 탐색을 계속했다. "통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두 가지 장이 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가 없다."
그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며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을 해결하고 통일된 장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끈기는 ㄹㅇ 존경스럽다.
☆☆☆☆☆
개인적인 생각인데, 젊은 시절의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 듣지 않고", 다른 학자들과 많이 교류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혼자 생각하고, 특허청에서 신박한 아이디어들을 검토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는 만나거나 편지를 보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고, 너무 많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그의 독립성이 훼손된 것이 그의 학문적 부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잡스처럼 싸가지가 없는 것은 아님. 온화하지만 할 말은 하는?
드 브로이 왈, "나는 특히 그의 온화하고 사려 깊은 표현, 그의 일반적인 친절, 그의 단순함 그리고 그의 친밀함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실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 역학을 공격할 때는 대부분 사고 실험을 이용했다. 이것도 설명할 수 있어? 저것도? 하는 식.
그런 실험들은 대부분 실제로 구현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냥 망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도 그런 사고 실험으로부터 나왔다. 또한 솔베이 회의에 참석한 신세대 물리학자들은 그의 사고 실험 공격을 모두 반박할 수 있었다.
미친놈들인가?
여기서도 훼손된 그의 독립성을 엿볼 수 있다. 다른 물리학자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던 특허청 시절과 달리 이제 그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기보다 기존 이론을 방어하기 위해 양자 역학에 흠집을 내는 데에 더 열중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과 상관없는 외부 세계에 대한 믿음은 모든 자연과학의 기반이다."
물리학은 자연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라는 보어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그 글의 결론에는 흄, 마흐, 그리고 어쩌면 젊은 시절의 아인슈타인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철저한 사실주의적 신조가 담겨 있었다.
<자연에서 원리 짜내기>
그는 이론의 최종 산물이 경험이나 실험으로 확인 가능해야 한다는 마흐의 철학을 따랐었지만 사실 과거에도 시작은 논리적 연역으로 시작했었다. 그의 논문은 인용이 적은 걸로 유명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실험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혔다.
이론가로서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힘은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일반적인 가설과 원리"라고 부른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의 일반화를 완성하면서 수학적 형식주의에 매몰된 것이 문제였다.
"어떤 경험적 사실에서도 그렇게 복잡한 방정식으로 구성된 형식을 찾아낼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도 본인이 수학적 우아함에 이끌림을 인정했다. "나는 실험적 사실에 의한 뒤로부터의 압력이 아니라 수학적 단순성에 의한 앞으로부터의 유혹에 의해서 인도를 받고 있다. 실험이 수학적 깃발을 따르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50대>
쉰 번째 생일을 맞은 아인슈타인은 조용한 생활을 원했다. 그래서 친구가 소유한 오두막으로 은신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를 찾아낸 유일한 신문사였다.
신문의 제목은 "생일날 숨어 있던 아인슈타인을 찾아내다."
그는 기자에게 선물 받은 현미경을 보여주었는데, 신문은 그가 "기뻐하는 소년"처럼 좋아했다고 보도했다.
☆☆☆☆☆
그의 매력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열정, 호기심, 즐거움인 것 같다.
혼자 보트를 타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보트를 정처 없이 떠다니도록 놓아두었다.
어느 방문객은 "그는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놀라울 정도로 행복해했다."라고 기억했다.
<여자들>
아인슈타인의 일생에서 여성과의 관계는 억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 비서 베티 노이만
- 부유한 미망인 토니 멘델
- 베를린 사교계의 에텔 미카노프스키
- 공개적으로 관계를 가졌던 마르가레테 레바흐 등
새 집을 지은 후에는 엘자가 매우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친구들이 계속 찾아왔다.
헬렌 듀카스:
엘자는 그녀가 "모든 면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먼저 아인슈타인의 비서 자리를 제안했다. 왜일까?
아인슈타인과 듀카스가 연인이라는 의혹에 대해 제레미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와 5분만 지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모함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그의 시간, 사생활, 명성, 훗날에는 유산까지를 맹렬하게 지켜냈다. 그녀는 언론인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중요하지 않은 편지는 쳐내고, 그의 사생활을 철저히 지켜주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케르베로스라고 불렀다.
<자식들>
첫째 한스는 아버지와 같이 연상의 볼품없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아인슈타인은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완강히 반대했고, 한스 또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완고했다.
둘째 에두아르트도 연상의 여자와 만났는데, 그녀와 헤어진 후 에두아르트는 우울증에 빠졌다. 가족력인 듯
아인슈타인은 더 젊은 "장난감"에서 재미를 찾아보거나, 직장을 찾아보라고 제안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단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해."
에두아르트는 심한 정신분열증을 앓아 아인슈타인을 평생 힘들게 했다.
<평화주의>
그는 미국에서 많은 인터뷰를 하고, 많은 장소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념인 평화주의를 전파하는 데 열심이었다.
쉰 살이 되면서 물리학의 선두에서 물러나던 그는 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권위에 대한 경계심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자유와 개인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도덕적 원리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는 우익이나 좌익의 모든 독재를 미워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과학 바깥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이고 순진하다."라고 평가했다.
상대성 이론도 충분히 비현실적인 것 같은데...
<종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법칙과 관계의 뒤에는 무엇인가 미묘하고, 막연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힘에 대한 숭배가 바로 종교입니다. 그런 정도까지를 말한다면, 나는 실제로 종교적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감이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요람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감정이다. 이런 감정이 낯설어서 더 이상 경외감에 감동하고 넋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은 죽어버린, 꺼져버린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그런 감정을 느끼려면 우리의 정신이 알아낼 수 없는,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간접적으로만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리고 그런 뜻에서만, 나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다."
"나는 마음대로 상상을 할 수 있는 예술가의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합니다. 지식은 제한되어 있지만, 상상력은 세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충실한 신도들보다 겸손함이나 경외감이 부족한 것으로 보이는 비신도들에게 더 비판적이었다.
- 전통적인 종교에 대한 원한 때문에 우주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
- 우주적, 종교적 느낌은 과학 연구의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숭고한 원동력이다
- 과학은 진리와 이해에 대한 영감으로 완전히 젖어든 사람들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의 원천은 종교의 영역에서 솟아난다
<자유의지>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견해에 담겨 있는 인과적 결정론에 대한 믿음은 인격적 신의 개념과 갈등을 빚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에서 그것은 적어도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양립되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도덕적인 사람이었지만, 엄격한 결정론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에 대부분의 윤리 체계의 핵심인 도덕적 선택과 개인적 책임과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아인슈타인도 개인의 선택은 천체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결정된다고 믿었다.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별의 운동에서처럼 인과적으로 얽매여 있다."
☆☆☆☆☆
나는 철학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를 전혀 믿지 않는다. 누구나 외부의 강요만이 아니라 내적 필요에 의해서 행동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지만, 의지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에서 진정한 감명을 받았다. 그의 말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삶에서 직면하는 어려움에 대한 끊임없는 위로였고, 확실한 관용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에 문명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명사회에 살고 싶으면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만 하기 때문에 마치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모든 사람의 행동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고 믿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선과 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살인자가 철학적으로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싶지는 않다."
그가 자유의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떠나서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의 가족에게는 아니지만" 적어도 인류 전체에 대해서 강력한 개인적 도덕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옹호했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용감하게 자신을 헌신했다. 그는 대체로 친절했고, 온화했으며, 점잖고 겸손했다. 그는 1922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엘자의 딸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적게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주어라."
우주를 경외하는 그의 종교관이 그를 더욱 겸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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