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었고 일론 머스크의 추천 책 중 하나이기도 해서 읽어보았다.
이 책은 600p가 조금 넘는 책이다.
원래는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는데 메모가 너~무 길어져서 절반 정도 읽은 지금 시점에 1부를 미리 써놓아야 할 것 같았다.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을 때도 메모가 엄청 길었는데, 나중에 그걸 다 정리해서 쓰려니 너무 막막해서 흐지부지 되었다.
게다가 책을 읽는데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소설이었으면 600p 정도 되는 책은 3일 만에도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은 메모할 거리가 너무 많고 과학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대충 읽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기 시작한 지 2주가 넘었는데도 이제 겨우 절반을 읽었다.
책을 다 읽은 것도 아니고 메모도 너무 많고 하다 보니 이전 독후감처럼 깔끔하게 정리해서 작성하기는 힘들 것 같다.
따라서 글은 '웬만하면' 페이지 순서대로 작성할 것이고, 또 이 독후감을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작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 1930년, 아들 에두아르트에게 쓴 편지에서 -
독행자 같은 성격, 반항적 성향, 호기심, 열정, 초연함
<어린 시절>
유년기에 성장이 매우 느렸다. 특히 말을 매우 늦게 배웠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훗날 그는 한 심리학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을 통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생각이 떠오르고 난 후에야 그것을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생각났다. 레오나르도 또한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여동생 왈, "끈기와 고집은 어릴 때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아주 시끄러워도 연필과 종이를 손에 들고 소파에 파묻혀서, 팔걸이를 불안한 잉크 스탠드로 삼아 문제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어릴 때 바이올린 강습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기계적인 훈련을 싫어했지만 모차르트를 접하고 난 후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적어도 나에게는 의무감보다 사랑이 훨씬 더 훌륭한 스승이다."
베를린에서 일반상대성 이론과 씨름할 때 친구가 기억하기를, "그는 늦은 밤에 주방에서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바이올린으로 즉흥곡을 연주했다. 연주를 하는 중간에 그는 갑자기 흥분해서 '풀었다!'라고 소리를 쳤다. 음악을 연주하는 중간에 영감이 떠오르듯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떠올랐던 것이다."
객원교수 시절 그는 강의 도중 계산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노트를 비워두라고 하더니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10분 후에 갑자기 해결 방법을 찾았다며 탄성을 질렀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어떤 문제를 계속 생각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10살 때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한 의대생 왈, "몇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가 가벼운 책을 읽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학교 친구나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년들과 함께 있는 것도 본 적이 없다."
- 어릴 때 유클리드에게 감동을 받지 못했다면 타고난 과학적 사상가가 될 수 없다.
- 나는 열두 살에 이미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꼈다. 나는 자연을 비교적 단순한 수학적 구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점점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 나는 대중과학 책을 통해서 성경에 소개된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실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생각은 국가가 의도적인 거짓말로 아이들을 속여왔다는 인식과 결합되어 사상의 자유에 대한 열정적인 집착으로 발전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 모든 종류의 권위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인식은 그런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나는 그런 인식을 버린 적이 없었다.
- 나는 음악에 따라 발을 맞춰 행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런 사람의 대뇌는 실수로 만들어진 것이다.
- 권위에 대한 바보 같은 믿음이 진리에 대한 최악의 적
<학창 시절>
16살에 첫 이론물리학 논문을 썼다.
독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김나지움을 자퇴하고, 스위스의 취리히 폴리테크닉(현 취리히 연방공대)에 조기입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봤지만 낙방했다. 그는 근처의 아라우 주립학교에 1년 동안 다니며 김나지움 졸업장을 따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교육개혁자 페스탈로치의 철학을 기반으로 세워진 학교였다.
페스탈로치 왈, "시각적 이해는 어떻게 사물을 판단하는지를 가르치는 필수적이고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고, 숫자와 언어를 배우는 것은 확실히 그보다 못한 것"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위대한 천재로 만들어줄 시각화된 사고 실험을 처음 경험했다.
사고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상징과도 같다. 이 책에서도 사고 실험으로 여러 가지 물리 현상들을 설명해 주는데, 확실히 이해가 쏙쏙 된다. 사고 실험의 위대함을 바로 느낌.
아라우의 동급생 비란트는 아인슈타인이 건방지고, 때로는 모욕적인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조롱하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했고, 그의 재치 있는 풍자는 모든 자만과 가식을 가차 없이 무너뜨려버렸다."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은 알베르트가 자신의 사업에 함께 참여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공학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본래 엔지니어가 되어야 했지만, 나의 창의적인 에너지를 일상적인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일로 많은 돈을 버는 데에 써버리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음악처럼 그 자체가 좋아야만 한다."
내가 운이 좋아 시험에 합격한다면, 나는 취리히 폴리테크닉에 입학할 것이다. 나는 4년 동안 머물면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할 것이다. 나는 이 과학 분야의 교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왕이면 이론 분야였으면 좋겠다.
내가 이런 계획을 가지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내 개인적인 재능에 맞는다. 내 욕망도 나에게 같은 결정을 하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에 맞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 밖에도 나는 과학 분야가 제공하는 독립성에 흥미를 느낀다.
<취리히 폴리테크닉>
건방진 성격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베버가 화를 내게 된 것은 권위에 가볍게 도전하고, 집단에 대해서 건방지게 대들며, 통속적인 지혜를 존중하지 않는 아인슈타인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특징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였다. 아인슈타인은 베버를 '교수님' 대신 '베버 씨'라고 불렀다.
베버 왈,
"자네는 아주 영리한 청년이네. 그러나 자네에게는 큰 결점이 하나 있네. 그것은 자네가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다는 것이네."
물리학 교수 장 페르네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페르네의 실험 수업에서 그는 실험 과정이 적힌 서류를 받았는데, 그는 서류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험했다.
그러다 결국 문제가 생겼다.
그는 페르네의 실험실에서 폭발 사고를 일으켜 오른손을 심하게 다쳤다.
그 후로 그는 실험을 꺼리게 되었고, 이론과 사고 실험에 더 집착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자신이 흥미가 있는 분야만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수학 교수 민코프스키는 수학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인슈타인을 '게으른 개'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부근의 알프스 호수에서 보트를 타기도 했다.
마르크발더 왈, "아직도 나는 바람이 멎어서 돛이 시든 나뭇잎처럼 축 처지면 그가 작은 노트를 꺼내어 무엇인가를 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즉시 항해를 시작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공부하는 데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행동했다.)
훗날 그를 멍한 교수처럼 보이게 해 주었던 산만한 행동, 무심한 치장, 해어진 옷차림, 건망증은 이미 학생 시절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가 여행을 할 때는 옷은 물론이고 때로는 가방도 잘 잃어버렸고, 열쇠를 잃어버리는 일은 하숙집 주인의 단골 농담이었다. 언젠가 가족 친구의 집을 방문했던 그는 "내가 가방을 두고 왔다. 그 집의 주인은 내 부모에게 '그 청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1921년 5월 미국 보스턴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 구직자 대상으로 유행하던 '에디슨 테스트'의 한 문항인 "음속은 얼마입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아인슈타인 왈,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정보를 기억하고 다니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표현할 때 'valiant swabian'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직역하면 '씩씩한 슈바벤 사람'이라는 뜻이다. 슈바벤 (독일 남부) 사람은 용감하고 성실하다는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정직함으로 위장한 무분별함
밀레바 마리치는 아인슈타인보다 3살이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았고, 우울증에 잘 걸렸고, 절름발이였고, 외모도 별로였다.
그가 마리치와 사귄 이유는 지적 관심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여친인 마리 빈텔러는 명랑하고 가벼운 타입이었다. 그에 반해 마리치는 물리학과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총명했고, 수학과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실업의 고통>
냉정하지만 충실한 아들이었던 그는 가족의 재정 문제로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심하게 속을 끓여 왔었다.
그가 건방지다는 사실 때문에 폴리테크닉 교수들로부터 원하던 조수 자리를 얻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폴리테크닉의 물리학과 졸업생 중에서 유일하게 직장을 구하지 못했으며, 오랫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나를 가장 절망시킨 것은 그동안 행복을 누리지 못하셨던 부모님의 불운이다. 나에게 더 큰 상처가 되는 것은 어른인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에게 짐만 될 뿐이다... 내가 죽어버리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공부 이외에는 한 번도 놀거나 한눈을 팔지 않았다는 생각이 나를 지켜주고, 때로는 절망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엄청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
"북해에서 이탈리아의 남단에 이르는 지역의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일자리를 요청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씩씩한 슈바벤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임신한 연인과 나눈 '행복과 즐거움'에 대하여 열광하면서 전자들에 대한 논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통념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아인슈타인의 태도는 더욱 심해졌고, 1901년에 이르러서는 과학은 물론이고 그의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그런 태도가 분명했다. 그해에 실업 상태의 열성적인 청년은 연속적으로 학문의 대가들과의 다툼에 휘말려 들었다. 그런 다툼은 아인슈타인이 힘 있는 사람에게 도전하는 일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런 다툼이 오히려 그를 더 기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요스트 빈텔러에게 "맹목적으로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가장 큰 적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어렵게 학원 강사 자리를 구했다. 원장은 그에게 방과 식사를 제공하는 대신 적은 봉급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원장과도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에게 함께 베른으로 옮기고, 자신에게 직접 돈을 지불하도록 설득했지만, 학생의 어머니가 반대를 했다. (이 부분도 머스크나 잡스 느낌)
그러자 그는 원장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니 식비를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 원장은 거부했지만 퉁명스러운 아인슈타인은 대안을 준비하라고 위협했고, 원장은 화를 내면서도 물러섰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에 따라 행동했던 그 장면을 마리치에게 설명하면서 "저항 만세!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내 수호신입니다"라며 즐거워했다.
그는 자신의 동생도 너무 편한 것만 찾은 탓에 "너무 멍청해졌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첫 자식인 리제를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리제를에 대한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편지도 모두 불태워져서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특허사무소>
결국 그는 일생에서 가장 생산적이었던 7년 동안 일주일에 엿새를 오전 8시에 사무실에 도착해서 특허신청서를 검토하며 보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을 빨리 마무리하면 낮 시간에 개인적인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상관은 사람들이 다가가면 무언가를 황급히 서랍 속으로 감춰버리는 아인슈타인을 눈감아주었다. (잡스처럼 아예 막무가내인 스타일은 아닌 듯. 최소한의 양심은 있음.)
더욱이 그의 상관은 이론학자에게도 유용한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 "신청서를 받으면, 발명자가 주장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라."고 지시했다.
저자는 그가 오히려 학계가 아니라 특허사무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오히려 독창성과 창의력을 기를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 왈, "엄청난 양의 논문을 생산하도록 강요하는 학계는 지적 천박함이 지배할 위험이 있다."
<올림피아 아카데미>
모리스 솔로빈은 개인 교습을 해준다는 광고를 보고 아인슈타인을 찾아갔다. 그들은 4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 번째 만남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돈을 받고 교습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고 했다. 나중에 하비흐트가 합류하여, 셋은 '올림피아 아카데미'를 결성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을 회장으로 위촉하는 위촉장에는 "완벽하고 분명한 박식함과 섬세하고, 민감하고, 정교한 지식을 갖추고 우주에 대한 혁명적인 과학에 젖어 있는 인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식인들 특: 지들끼리 이야기하는 거 좋아함)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생일에 깜짝 선물로 캐비어를 준비했지만 그는 갈릴레오의 관성 법칙에 대해 얘기하느라 캐비어를 먹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카데미에서는 많은 책을 같이 읽었는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데이비드 흄과 에른스트 마흐였다.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 (참고)
1. 인과 관계의 필연성 부정: 어떤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그것이 다음에 똑같은 인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2. 실체 부정: 물체는 '실체'와 '속성'으로 나뉘는데, 실체는 사과 그 자체, 속성은 사과의 맛, 색, 무게 등을 말한다. 실체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다. 우리가 지각하지 않을 때 실체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실체', 즉 '사과'라는 개념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흄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외의 지식에 회의적이었고, 심지어 분명한 인과법칙까지도 의심했다.
에른스트 마흐는 19세기에 실증주의, 주관주의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천재성이 "절대 변하지 않는 회의주의와 독립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것은 아인슈타인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마흐는 뉴턴의 절대 시간, 절대 공간 등의 인식에 대해 "경험으로 드러낼 수 없는 쓸모없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비난했다.
아인슈타인의 가장 큰 업적인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 "시공간의 절대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는 흄과 마흐로부터 관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회의적인 견해는 천성인 통념과 권위에 대한 의심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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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통념을 믿지 않았고 권위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가 아닌 남들이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령 우리가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했고,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완벽한 증거가 될 수 없지만 우리는 그냥 믿고 살아간다. (물론 검증할 방법은 수없이 많고 월식처럼 우리가 그것 중 무언가를 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는 이유는 '검증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 아인슈타인에게는 세계가 다르게 보였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인 미지의 세계로. 그래서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과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뉴턴, 아인슈타인이 왜 지리는가?
체계를 정립했기 때문에. 모두가 그 체계 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는 광양자 이론을 발표할 때, 브라운 운동과 상대성 이론을 설명할 때도 그 아이디어가 '이전 관련 연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의 논문에는 다른 문헌의 인용도 거의 없다. 그것들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거대한 세계의 법칙과 가정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항상 갖고 있었다.
↪ 표식(데미안에 나오는)을 가진 자들의 특징: 기존의 관습이나 권위를 무시하고 자민만의 규칙과 체계 속에서 움직임.
↪ 그가 베버 교수를 '베버 씨'라고 부른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는 베버를 교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사회적 지위나 통념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가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럴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쯤부터 (일반 상대성 이론 완성은 1915년) 특수 상대성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경험주의에 기반한 마흐의 철학에서 점점 멀어졌다.
1919년 그는 "물리학의 귀납과 연역"이라는 글에서 연역적 방법을 좋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실험과학에서의 창조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귀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진 큰 발전은 많지 않다. 진정으로 위대한 발전은 귀납과는 거의 정반대가 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과학자들은 아주 복잡한 사실들의 핵심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로부터 가상적인 기본 법칙을 가정한다. 그런 법칙으로부터 결론이 유도된다."
"우리가 더 깊이 파고들어 가고, 우리의 이론이 더 광범위해질수록 이론을 결정하는 데에 필요한 경험적 지식은 점점 더 줄어든다."
<특수 상대성 이론>
그는 베프인 미셸 베소와 함께 상대성 원리와 빛 가설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다 갑자기 '절대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동시에 일어난 어떤 두 사건에 대해, 그 사건들이 '정말로, 절대적으로 동시에 일어났는지' 증명할 방법은 없다.)
저자 왈,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은 어느 정도의 수학이 있기는 하지만 우수한 고3 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만한 수준이며, 대부분은 언어와 사고 실험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로렌츠, 푸앵카레 등 뉴턴이 주장한 시공간의 절대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은 아인슈타인 말고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방점을 찍은 것이 아인슈타인이 된 이유를, 여러 과학자들은 그가 '혁명가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존의 틀을 과감히 폐기해 버렸다.
특허사무소에서 일주일에 6일을 8시간씩 일하면서도 1905년에 5편, 1906년에 6편, 1907년에 10편의 논문을 쏟아냈으며, 일주일에 한 번은 현악 사중주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했고, 마리치에 의하면 아들과도 자주 놀아줬다고 한다. (이 사람은 몸이 10갠가?)
<상대성 이론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
1. 똑같아 보이는 현상에 대해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꼈다.
움직이는 코일 = 움직이는 자석, 중력 질량 = 관성 질량
2. 실험으로 관찰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관찰자가 움직이고 있는지 보고 있는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지 결정할 수 없다. (상대성 원리)
통 속에 있을 때는 아래로 짓눌리는 힘이 중력 때문인지 가속으로 인한 관성 때문인지 증명할 수 없다.
3. 일반화와 통합을 하고 싶어 했다. 특수한 경우에 대한 법칙과 다른 모든 경우에 대한 법칙이 달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교수>
클라이너가 아인슈타인을 부교수로 뽑기 위해 그의 강의를 청강했는데 말아먹었다. 클라이너는 그에게 강의 기술이 부족하다고 말했는데, 그는 "꼭 필요한 자리는 아니다"라며 반박했다. 그 뒤로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쿨찐)
하지만 그의 강의에 대한 클라이너의 비판이 독일에까지 널리 퍼지자, 그는 "나에 대한 비판적인 소문을 퍼뜨린 것"을 크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클라이너는 이후 마음이 약해져 아인슈타인이 일자리를 찾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거도 약간 잡스 생각남)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 왈, "그는 충동적이었고,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팔을 잡고 이야기했다."
오스트리아 정치인 프리드리히 아들러 왈, "가장 독립적이며, 독행자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오만하지는 않다."
푸앵카레 왈,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가장 독창적인 사람 가운데 한 명", "내가 그에게 특히 감탄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그는 고전적인 법칙에 얽매여 있지 않고, 물리학 문제에 직면하면 모든 가능성을 기꺼이 상상합니다."
그는 모든 산만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집중하면 아이가 아무리 큰 소리로 울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게임할 땐 그랬는데...)
친근한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옮기는 것은 가족에게는 큰 부담이었지만, 그에게는 직장이 더 중요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돈으로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고, 본인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기간이 길었으며, 자식도 있었기 때문인지 돈에 대해서는 은근히 현실적인 모습?
그를 프라하 대학의 정교수로 추천하는 막스 플랑크의 추천서에는 상대성 이론이 "이론과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대담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역시 사람은 대담하게 큰 일을 해야 함.)
다른 사람을 평가질 하는 게 잡스랑 결이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 (잡스는 면전에다가 말하는 게 다르지만)
마리 퀴리와 랑주뱅의 불륜 의혹이 불거졌을 때 한 말,
"열정적인 성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구에게 위험이 될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다."
마리치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외가로부터 유래된 정신분열적인 유전인자 때문이 틀림없다."
나는 줄곧 평가질('질'을 붙인 것은 그 내용이 상당히 상스럽기 때문에...)을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안 좋은 게 맞지만) 근데 아인슈타인도 잡스만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면적으로는 평가질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잡스의 전기를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독립적으로 생각하려면 "모든 것을 자기만의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사람들은 속으로는, 아니면 친한 사람들끼리는 남을 평가질하는 생각이나 말을 하는 건가?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평가하지도 않는다. 내가 이상한 걸까? 사람들은 원래도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평가질을 하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별로 없고, 내가 궁금해한 사람들은 거의 위인들이다 보니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단지 나와 다를 뿐인데도 어떤 성질이 위인들만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글을 쓰다가 갑자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게 평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관계에 있어서도, 일자리와 물리학에 있어서도 의외로 열정적인 사람
마리치와의 결혼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자신의 문제에만 열중하고 있어. 그것을 위해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부끄럽지만 우리는 그에게 중요하지도 않고, 둘째일 뿐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어."
파울 헤르츠는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만약 당신이 과학을 이해해하려는 만큼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면,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모욕적인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인정했다. "나는 과학을 이해하려는 만큼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학은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도피처이기도 했다. "과학에 대한 애정은 이런 상황에서 더욱 번영하게 됩니다. 그런 애정이 객관적으로 나를 눈물의 세계에서 평화의 세계로 격상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수학에 약했기 때문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정립하면서 수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천재'라고 하면 혼자 고독하게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그런 이미지가 그려진다. 나의 고정관념을 깬 첫 번째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그는 매우 사교적이었으며 모든 분야에 능통했다. 아인슈타인 전기를 읽으면서도 약간 천재에 대한 이미지가 벗겨지는 것 같다. 그는 가정이 있었고, 바이올린을 켰으며, 다른 지식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또 1905년에 5편의 논문을 발표하기 전부터 4편의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 이론 발표 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기까지 10년의 시간 동안 그것만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빛의 양자-파동 이중성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다.
한 가지 문제에만 매달리지 않고 여러 가지 문제들을 동시에 안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1. 그가 미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하도록 만들어주었으며, 2. 더 독창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아닐까? 일론 머스크도 여러 개의 사업을 병행했었고, 하고 있다.
그는 반전주의자였다. 그리고 전쟁이 근본적으로 "남성의 본성인 공격성"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도 자신의 공격성을 느꼈기 때문에 저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1915년, 전쟁과 이혼 문제로 인한 모든 정치적, 개인적 혼란 속에서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여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 완성 직전, "나는 일에 몰두해서 점심 먹는 것도 잊는 경우가 많다."
상대성 이론의 일반화된 공식을 완성하기 위한 천재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와의 경쟁이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적당한 압박 속에서 가장 최고의 퍼포먼스를 발휘하는 듯.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힐베르트가 없었더라면 훨씬 더 늦게 완성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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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책의 절반 정도를 읽었다. 읽으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표식"의 열쇠는 "독립성"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만 결정한다. 물론 그들의 지식은 과거의 위대한 사람들, 또는 주변의 현명한 사람들에게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지식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곱씹고 사유하고, 심지어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들은 종종, 또는 항상 무례하거나 냉정해 보인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대부분 통념이나 남들이 정한 규칙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 나오며, 거기에는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가 했던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규칙을 어기고 모든 요구사항에 의문을 제기하라"
표식을 가진 자들의 "무례함"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도 범죄자와 같이 통념에 어긋나는 사람이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무례한 말이나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다른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나 평판이 좋은 사람, 자신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런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기준은 "사회적 통념"이 아니기 때문이고, 집단에서 배척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이 책을 읽는 이유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세계"를 알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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