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을 읽고 나랑 인생관이 비슷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고, 헤세의 다른 책도 읽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집어든 게 『황야의 이리』다.
황야의 이리는 데미안의 철학을 일부 이어받고 있고, 나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애초에 내 인생관이 그쪽과 비슷하기도 하고) 독후감을 작성할 예정이니, 안 본 사람은 데미안 독후감을 먼저 읽고 오시라.
(맨 밑에 황야의 이리 두 줄 요약 있음)
시민과 성자
데미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점:
- 진정한 인간(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두려운 것이어서, 그 길을 가는 자는 소수이다
- 인간은 여러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룩한 이상에 완전히 자신을 바친 성자,
본능이나 감각의 요구에 온몸을 바쳐 순간적인 쾌락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탕아,
그리고 그 중간에서 적당히 살아가고자 하는 시민이 있다.
시민:
시민은 이 양자의 중간쯤에서 적당히 살아가고자 한다. 쾌락이건 금욕이건 그는 결코 어디에도 몸을 던지는 일이 없고, 결코 순교자가 되는 일도, 자신을 파괴하는 데 동의하는 일도 없다. 그 정반대이다. 그의 이상은 자아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신성도 타락도 아니다. 무조건,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신에게뿐 아니라 쾌락에게도 봉사하고자 하며, 미덕을 행하고자 하면서도 또한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양극단 사이에, 격렬한 폭풍도 벼락도 없는 쾌적하고 온후한 지대에 자리 잡고자 애쓴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또한 성공을 거두는데, 이때 성공은 무조건적이고 극단적인 쪽을 향한 삶이 부여하는 저 강렬한 생활력과 감정을 희생하고 나서야 얻어지는 것이다. 자아를 희생해야만 강렬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시민은 자아를 (물론 발육부진의 자아에 불과한데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어쨌든 그는 강렬한 삶을 희생한 대가로 자신을 보존하고 안정을 얻으며, 신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양심의 평온을 거두어들이고, 쾌락 대신 쾌적을, 자유 대신 편안함을, 치명적인 작열 대신 적당한 온기를 얻는다. 따라서 시민은 그 본질상 삶의 추진력이 약한 존재, 불안에 떨며 자신을 희생하기를 두려워하는, 지배하기 쉬운 존재이다. 그래서 시민은 힘 대신에 수(數)를, 권력 대신에 법률을, 책임 대신에 투표를 내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시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인 '황야의 이리'가 깨끗하게 잘 관리된 남양삼나무를 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시민적 삶을 동경하는 장면도 나온다.
자아를 희생하고 영원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
- 데미안에서 말하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된 사람을 말한다
- 인도 철학적으로 '이상적'이다
- 위업을 남겨 죽은 후에도 죽지 않은 불멸의 위인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업적의 유무가 조건은 아니기 때문에)
- 이 책에서는 모차르트, 괴테가 여기에 속한 사람들의 상징으로 나온다 (주인공이 매우 존경하기 때문에)
- "이들에게는 오늘은 단두대가, 내일은 기념비가 마련될 것이다."
자아를 버려야 하는가?
힌두교에서 '해탈한 사람'은 '완전한 신의 도구가 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자아라는 게 없다.
데미안적으로 봐도 '온전히 속에서 끓어오르는 대로 행동'하려면, 자아는 방해가 된다.
다른 사람이 쓴 황야의 이리와 데미안 독후감들을 보면, '자아를 찾는 과정'으로 요약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인도 철학적으로 (특히 힌두교) 해석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자아를 버려야 한다.
헤세는 평생 동양 철학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데미안은 내가 보기에 인도 철학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등장인물이 힌두교 경전 중 하나인 『베다』를 언급한다.
"헤세의 작품 중 가장 자전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황야의 이리에서는 헤세 자신을 의미하는 주인공 황야의 이리가, 또 다른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주인공격 신인 '크리슈나'에 관심이 있었고, 과거에 사람들과 크리슈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는 언급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언급된다.
거기다 '시민'에 대한 설명 부분만 읽어봐도 강렬하게 살려면 자아를 내던져야 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헤세가 생각하는 '이상'은 단순히 자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한 인간'에 추가적인 해석을 가미한다.
자아의 다원성
'황야의 이리'는 주인공 '하리 할러'의 별명이다.
하리는 자신이 '시민'과 '이리'의 두 가지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리'는 하리가 스스로 만든 개념으로, '시민적이지 않은 모든 모습'을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 표현한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황야의 이리>라든가 <두 개의 영혼>이라든가 하는 말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시민 사회에 대해 그렇게 소심한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하고 슬픈 일이다. 부처를 이해하고 인간성의 극락과 지옥을 예감하는 사람이라면 상식과 민주주의와 시민적 교양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아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이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은 소심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차원이 점점 높아져 자그마한 시민의 다락방이 너무 좁게 느껴지면, 그는 그것을 <이리>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이리가 때로는 그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 내면에 있는 거친 것은 모두 이리라고 부르고, 그것을 심술궂고 위험한, 시민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섬세한 감각을 지닌 예술가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자기 내면에는 이리 뒤에 다른 많은 것들도 살고 있다는 것, 물어뜯는 것이 다 이리가 아니고, 여우나 용, 호랑이, 원숭이, 극락조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또한 그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인간이 거짓 인간인 시민에 억눌려 있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것과 겁나는 것, 큰 것과 작은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등 여러 가지 형상들로 이루어진 이 온 세상, 이 천국의 정원 전체가 이리의 동화에 억눌려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한다.
수백수천의 나무와 꽃, 수백수천의 과실과 풀로 가득 찬 정원을 상상해 보라. 만약 그 정원의 정원사가 <식용 식물>과 <잡초> 이외에는 다른 식물학적 구분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이 정원의 9/10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할 것이다. 그는 가장 매력적인 꽃들을 뽑아버리고, 가장 귀한 나무들을 잘라버리거나 아니면 싫어하거나 못마땅해할 것이다. 그는 <시민>이나 <이리>라는 부류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헤세의 이상은 자아를 버리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자아를 끝없이 확장하여 "세계 전체를 고통스럽게 확장된 영혼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표현이 다소 어렵긴 하지만, 이 설명도 엄밀히 말하면 자아를 버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보통 사람들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성격이야" 하는 것들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뒤로 돌아갈 길은 없다. 이리로 돌아갈 수도,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도 없다. 창조된 모든 것은 가장 단순해 보이는 것마저도 순수하지 못하고 뿔뿔이 분열되어 있으며, 생성이라는 더러운 물결에 던져져 결코 그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갈 수 없다. 창조되기 이전의 순수 상태로, 신에게로 이르는 길은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너는 <인간이 된다>는 멀고도 힘겨운 고난의 길을 가야 할 것이고, 너의 이원성을 다원화하고, 너의 복잡성을 훨씬 더 고도화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마침내 평온에 이르기 위해서 너의 세상을 좁히고, 너의 영혼을 단순화하지 말고, 더욱 많은 세계를, 결국은 이 세계 전체를 너의 고통스럽게 확장된 영혼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부처를 비롯한 모든 위대한 인간들은 이 길을 걸었다. 어떤 이는 깨닫고서 어떤 이는 깨닫지 못한 채 자기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걸어갔던 것이다.
자전적 소설
하리 할러는 영락없이 헤르만 헤세 본인을 의미하고 있다.
- 사회로부터의 고립, 정신 분열, 자살 충동, 실존적 위기 - 때문에 데미안 집필 시절 받았던 심리 치료를 다시 받기 시작한다.
- 이니셜이 같다: H. H.
- 하리의 나이는 50에 가깝다고 나오며, 헤세가 황야의 이리를 완성했을 때 50살이었다.
- 황야의 이리가 완성되기 몇 년 전부터 그는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실패하고 다락방에서 지냈다. 하리 또한 애인이 있지만 자주 다퉈 별거 중이며, 다락방에서 하숙을 한다.
- 헤세는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조국 독일을 강하게 비판하여 욕을 많이 먹고 스위스로 이주했다. 하리 또한 과거에 반전사상을 주장했으며 그 때문에 욕을 많이 먹고 작중 시점까지도 신문에 종종 그를 비난하는 기사가 실린다.
- 작품을 완성하기 직전 겨울에 헤세는 가장무도회에 참석했는데, 하리 또한 가장무도회에 참석하여 환락의 도취를 경험한다.
이 작품은 여지없이 헤세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황야의 이리는 '진정한 인간 실현'이라는 목표를 시민들보다는 더 잘 의식하고 있지만,
- 자아를 향한 절망적인 집착
- 죽지 않으려는 절망적인 의지
때문에 그것들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영원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 오히려 불멸로 통한다는 사실로부터 눈을 감고 알려하지 않는다.
'황야의 이리'가 의미하는, 헤세 본인이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은 끼인 사람들이다.
1. 시민과 '영원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 사이
황야의 이리는 소박한 삶에 만족할 수 없고 끝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성향을 타고났다. 그래서 시민적 삶에 녹아들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두려움들 때문에, 영원에 자신을 던지지도 못했다.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는, 그런 위태로운 상황인 것이다.
2.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뼈저리게 느끼고 전후 시대를 맞이한 지식인들
기존의 고전적인 가치들이 (모차르트, 괴테) 저평가되고 (가벼운) 미국적, 시민적 가치들이 떠오르면서 당대 지식인들이 겪은 '실존적 위기', '시대의 병리'를 다루고 있다.
그는 성자 쪽으로도 탕아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어딘가 허약한 구석이 있어서 혹은 게으르기 때문에 자유롭고 거친 세계로 도약할 수 없고 시민 사회라는 무겁고, 버거우면서도 포근한 별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있는 그의 상태이고, 그가 세상과 얽혀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인한 자들만이 시민의 땅의 대기를 뚫고 우주에 닿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체념하거나 타협하고, 시민 사회를 경멸하면서도 거기에 귀속되어서, 결국은 살아남기 위하여 그 사회를 긍정함으로써 시민 사회를 강화하고 찬미하고 만다. 이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비극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불운이요 불행인 셈인데, 그 불행의 지옥 속에서 이들의 재능은 단련되고 풍성해지기도 한다. 세상과 연을 끊어버린 사람들만이 절대의 경지로 나아가고, 놀랍도록 황홀하게 몰락한다. 이들은 비극적인 인물이고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해결책?
하리는 '헤르미네'를 통해 여자, 마약으로 대표되는 쾌락의 세계에 빠져든다.
헤르미네는 데미안의 에바 부인과 같이 주인공의 '아니마'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자신이 거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 정원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따듯했다. 다시 삶의 왕관을 찾아 나서는 것, 삶의 끝없는 죄를 참회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가벼운 삶, 가벼운 사랑, 가벼운 죽음 - 그것은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론적으로 헤세는 '유머'를 최종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유머란 삶에서 진지함을 내려놓고, 삶의 부조리에 얽매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런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작품 중간에 나오는 <황야의 이리론>이라는 글에서는 유머가 '영원으로 가기 위한 해결책'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는 도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민 사회에 얽매여 있으나 그래도 재능을 인정받는 사람들에게는 제3의 세계가 열려 있다. 그것은 가상적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세계, 즉 유머의 세계이다. 언제나 지독스레 괴로워하고 평화를 상실한 황야의 이리들은 비극을 감수하고 우주로 뛰어들 힘도 없고, 절대에 대한 소명을 자각하면서도 절대 속에서 살아갈 능력도 없기 때문에, 이때 이들에게 남는 탈출구가 유머이다. 유머는 항상 어느 정도는 시민적인 것이다. 물론 진정한 시민은 유머를 이해할 능력이 없지만 말이다. 유머의 가상적인 영토에서 황야의 이리들의 분열되고 뒤틀린 이상이 실현된다. 여기서는 성자와 탕아를 동시에 긍정하고, 이 양극단을 구부려 서로 만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까지도 긍정할 수 있다. 성자에게 있어서는 죄인을 긍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성자나 죄인 모두에게 있어서, 그리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민성이라는 저 미지근한 중용을 긍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하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이를 저지당한 비극적인 사람들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으나 불행한 사람들의 탁월한 발명품인 유머, 오로지 (아마도 인간의 가장 독특하고 천재적인 업적일 터인) 유머만이 이 불가능한 일을 실현할 수 있다. 유머만이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들과 통합시킬 수 있다. 세상을 부정하면서 세상에 사는 것, 법을 존중하면서도 법을 넘어서는 것, 소유하지 않는 듯이 소유하는 것 - 자주 인용되고 즐겨 요구되는 이 모든 고귀한 삶의 지혜들을 실현시켜 주는 건 오직 유머뿐이다.
그래서 유머의 재능과 착상이 있는 황야의 이리는 시민 사회라는 지옥의 후끈거리는 혼란 속에서도 유머라는 이 마법의 물약을 마시고 땀을 흘리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아직 그에겐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가능성과 희망은 있다. 그를 좋아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이렇게 구원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면 그가 비록 영원히 시민적인 것에 머물게 되더라도, 동시에 고통을 견딜 수 있고 결실을 맺게 될 테니까. 그가 애증의 감정 속에서 시민 세계와 맺는 관계에는 감상이 사라질 것이고, 이 세계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더 이상 괴로운 치욕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럼 헤세는 "아등바등 살지 말고 그냥 타협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바로 이 책에서 '영원불멸'의 상징인 모차르트와 괴테가, 비록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일지라도 유머를 긍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잠깐 <황야의 이리론>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이 책은 <편집자 서문>, 그리고 <하리 할러의 수기>로 이루어져 있다.
<편집자 서문>은 30페이지 정도로, 제 3자의 입장에서 본 하리 할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하리 할러의 수기>는 말 그대로 하리 할러가 쓴 수기다. 이 수기를 편집자가 발견하여 펴냈다는 설정이다.
<황야의 이리론>은 하리가 어떤 수수께끼의 사내에게서 받은 소책자로, <수기>의 초반에 하리가 직접 읽기 때문에 그 내용이 나온다. 하리의 심리를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분석해놓은 듯한 글이다. <수기>와 달리 상당히 분석적이고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때문에 이 글에서 장문으로 인용한 글들은 대부분 <황야의 이리론>에서 나왔다. 하리에 대한 분석은 물론, <수기>의 후반 내용에 대해서도 암시하고 있다.
작품이 끝나고 나오는 작품 해설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편집자 서문>이 하리 할러의 외적인 모습에 대한 인상을 주관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황야의 이리론>은 [황야의 이리의 내면의 초상]으로서 그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객관적, 심리학적 분석을 가한다. 나아가 여기서 <수기>에서 전개될 사건이 복선을 통해 의미심장하게 암시되고, 특히 그 후반부는 앞서의 분석을 뒤집는 분석과 주석을 가함으로써 일종의 [메타 메타 픽션적]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정치한 구성은 [황야의 이리]의 전체상을 개연성 있게 그려내기 위한 심미적 장치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그러니까 '앞서의 분석을 뒤집는 분석'이라는 게, <황야의 이리론>에서는 유머가 '이리가 시민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타협의 도구'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유머는 '현실의 모순을 수용하면서도 영원으로 갈 수 있게 해주는 도구'였다는 것일까?
일단 GPT는 그렇다고 하긴 하는데...
철학에 정답은 없고, 헤세가 말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어쨌든 작품의 핵심 주제는 삶의 모순과 고통을 웃어넘길 줄 아는 유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묘하게 니체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한 '위버멘쉬'(한국에서는 대부분 '초인'으로 알고 있다)가 생각난다.
또한 위버멘쉬의 나무위키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재밌게도, 이 책에서 또한 '영원불멸'에 속한 사람으로 괴테가 나온다.
황야의 이리 두 줄 요약
- '황야의 이리'는 '진정한 인간 실현'이라는 목표를 인식하고는 있으나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새로운 시대 속에서 실존적 위기를 겪는 사람들, 그리고 헤세 본인을 의미한다.
- 그런 사람들이 처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삶의 모순과 고통을 웃어넘길 줄 아는) '유머'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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