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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독후감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 (2부)

1부   [2부]   3부   4부   5부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독후감을 두 번으로 나눠 쓰게 될 줄은 몰랐다.

1부를 쓸 때는, 3부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2부를 쓸 때는... 


<먼 곳을 보는 사람>

'과학 문제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이 보여주었던 완고한 인내심은 개인적인 문제의 경우에 보여주었던 조급함과 같은 수준이었다.'

"나는 먼 곳을 잘 보는 사람을 닮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광활한 지평선에 매혹되고, 불투명한 물체 때문에 먼 곳을 보지 못하게 될 경우에만 앞에 있는 것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예술이나 과학에 빠지도록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 중의 하나가 바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거칠고, 절망할 정도로 적막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개인 경험의 좁은 소용돌이에서는 찾을 수 없는 평화와 안정을 찾기 위해서 이 우주와 그 구조를 자신들의 감정생활의 중심으로 삼는다."


<이혼>

밀레바와의 별거와 전쟁이 겹쳐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고, 만성 위장병에 걸렸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혼 문제를 마무리한 후 발트 해의 휴양지로 7주 휴가를 떠났고, "양자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관습에 따라 이혼 허가서에는 '2년 동안 재혼 금지'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4개월 만에 결혼했다.

(일론 머스크 - 규칙을 어겨라)


<11월 혁명>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집착했던" 그는 중앙 통제를 강화하는 어떤 혁명이나 정부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베를린의 학생 혁명주의자들이 총장과 학장들을 투옥했을 때, 그는 물리학자 막스 보른과 행동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를 포섭하여 동료들을 석방시키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 (한다면 하는 남자)

 

그들이 학생 소비에트가 모여 있던 회의장에 들어서고, 의장은 자신들이 마련한 대학의 새로운 규정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망설였지만,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비에트들이 새로 만든 규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적 자유"라며 비판했다. 

보른 왈, "막강한 힘을 가진 그 젊은 신사는 난처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의견을 듣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게 더 중요한 사람, 이 부분도 ㄹㅇ 잡스같다)


<재혼>

그는 엘자와 각방을 썼으며, 그녀는 과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탁월한 공생이었다. 그녀는 내조의 여왕이었고, 그의 명성을 좋아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고, "그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과학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녀는 그의 멍한 시선으로부터 그가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고, 더 이상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서재에서 서성거리면, 그녀는 음식을 올려 보냈다. 그는 강렬한 집중이 끝나면, 내려와 식사를 했고, 때로는 엘자와 그녀의 딸들에게 산책을 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필리프 프랑크는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그런 가정에서 언제나 손님 같았다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엘자, 아인슈타인


<창의력>

타인의 생각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배척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창의력을 가질 수 있었던 듯하다.

 

★ ★ ★ ★ ★ 아인슈타인의 창의력에 대하여 ★ ★ ★ ★ ★

나는 창의력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창의력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는 능력"이 아니었다.

 

애초에 특수 상대성 이론도 빛의 성질과 상대성 원리를 결부시켰을 때 생기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고안한 장치다.

그것은 "기발한 생각"이 아니라 그의 이론, 사고 실험에 의하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었다. 시공간이 상대적이지 않으면 모순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제안한 많은 이론들이 사후에도 계속 맞는 것으로 판명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제안은 아무렇게나 생각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달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밀물과 썰물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찾아 나선 것이다.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무언가'를. 그러다가 그는 "지구의 인력에 영향을 미치는 위성이 존재해야만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본 한 천문학자가 실제로 달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창의력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성 이론에 대한 첫 검증인 1919년 개기 일식의 관측 결과를 받았을 때, 그는 의외로 차분했다. 

"나는 이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실험을 거의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론에 대한 검증 조차 하지 않고 "내 이론이 맞다는 것을 누군가가 검증해 주길 바란다"는 식으로 논문을 끝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물리학의 통념이 자신의 우아한 이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면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 통념을 의심했고, 그런 고집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았다.


<명성>

상대성이론과 자신에 대한 기사를 본 아인슈타인 왈, "나에 대한 신문 기사는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런 종류의 과장은 대중의 요구에 들어맞는다."

 

그는 갑작스럽게 얻은 큰 인기와 명성에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사실 꽤 즐겼다. 

그는 인터뷰에 쉽게 응했고, 재미있는 표현으로 즐겁게 해 주었으며, 어떻게 하면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언론의 관심을 피하지 않은 것은 시대상을 고려하면 꽤 이례적인 것이었다.

막스 보른은 상대성에 대한 책을 발간했을 때 책에 아인슈타인의 사진과 짤막한 경력을 실었는데, 둘의 친구였던 막스 폰 라우에는 질겁하여 아인슈타인에 대한 소개를 빼라고 했다. 과학 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학술계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악으로 여겼다. 

통념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는 성향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한 유대인 작가가 그의 전기를 쓰겠다고 요청했을 때, 그는 허락했다. 그러자 동료들이 뜯어말렸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일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무심한 방관자*처럼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견뎌낼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자신이 극장의 관객인 것처럼 여기기를 좋아했다.

 

그는 프라하 여행 때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필리프 프랑크의 사무실에서 지내며 소파에서 잠을 잤다. 

프랑크 왈, "그렇게 유명한 사람에게는 적절하지 못했지만, 소박한 생활을 하고, 사회규범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잘 어울렸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나는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네. 물론 그런 일은 아주 일상적인 현상이지." 

뉴욕 타임스, '아인슈타인에 의해 새로운 물리학이 시작되었다.'


<외로운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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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랑을 했고, 우정을 쌓았고,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내며 온화한 성격을 가졌지만, 이중적인 냉정함 또한 가지고 있었다. 

"사회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나의 열정적인 감각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싫어하는 내 성격과 이상하게 대조가 되었다. 나는 정말 '외로운 여행자'이고, 조국, 가정, 친구, 또는 심지어 가까운 가족과도 진심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모든 관계 속에서 나는 거리감과 고독감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레오폴트 인펠트 왈, "아인슈타인처럼 고독하고 냉정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는 한 번도 가슴 아파해본 적이 없었고, 평생을 최소한의 즐거움과 감정적 무관심 속에서 살았다. 그의 지극한 친절함과 품위는 전혀 비인간적인 것으로,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막스 보른 왈, 

"그의 친절함과 사회성과 인류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환경과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완전히 냉담했다."

 

그의 냉정하고 싶은 욕망은 사교적이고 싶은 욕망과 충돌했다. 그는 자기 내면의 상반되는 힘을 인식했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간은 동시에 고독하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한 존재이다."

이거 ㄹㅇ 공감

 

그는 이성 관계에서도 자신의 독립성이 훼손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면 벽을 만들었다. 특히, 가족과의 문제는 그가 다른 사람과의 강렬한 감정적 관계를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는 감정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 직면하면 과학의 객관성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But,

 

아들 한스 왈, 

"어머니는 아버지가 허세를 부리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마음을 상하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케테 프로인틀리히 왈, 

"아인슈타인도 다른 사람처럼 울었고, 나는 그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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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하기 싫은데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은 절대로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이게 킥인데? 냉정하게 보이는 것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음'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 같은데?

 

노벨상 위원회 측으로부터 시상식 참여를 위해 아시아 여행을 가지 말 것을 권고받았지만, 당연히 아인슈타인은 듣지 않았다.


<시온주의>

시온주의와 같이 어떤 거대 집단에 속했을 때도 그는 항상 본질을 꿰뚫고 있었고, 단순히 휩쓸린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해 본 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는 반유대주의의 확산이 단순한 인종차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 방문>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첫 미국 방문이 스위스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야 할 돈을 안정적인 화폐로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프린스턴과 위스콘신에 15,000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금액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미끼를 물기만 한다면, 나는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게 되겠지요. 냄새만 맡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연구만 하는 고고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든, 과학에 열중하기 위함이든, 어쨌든 간에 돈을 벌기 위해 일생 동안 고군 분투했다. (하지만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는 배에서는 물론 호텔에서도 일을 할 수 있도록 엘자와 다른 방을 쓰고 싶다고 요구했다.

 

《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유별나게 친절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대학 교육의 가치는 많은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훈련을 받는 것에 있다."

1921년, 뉴욕에 도착한 아인슈타인


<1920 ~ 1923> (히틀러의 등장과 유대인 탄압)

명성에 대한 불안과 몸을 낮추며 살겠다는 각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저녁 만찬에서 누군가가 비참한 세계정세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지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구가 아주 작은 별이고, 어쩌면 더 크고 더 중요한 별들은 아주 순결하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기에, "어리석은 친구들이 벽을 (통곡의 벽) 향해 서서 기도를 했다. 과거에 젖어서 미래는 없는 사람의 불쌍한 모습"

보통은 신중하게 대답을 했다.


<학문적 몰락>

한때 그는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이런 통찰에서 저런 통찰로 옮겨 다니고, 구속의 낌새가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거부하던 들뜬 반항아였던 적도 있었다. 그는 통속적인 관습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런 모든 것들을 인간화시켰다. 스스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보헤미안을 꿈꾸는 낭만적인 젊은이였던 그는, 이제 몇 가지 역설적인 냉정함을 제외하면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부인과 무거운 가구로 채워진 가정을 가진 부르주아 생활에 안주해 버렸다. 그는 더 이상 들떠 있지 않았다. 그는 편안했다.

 

"정말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일은 젊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네. 경험이 많아지고 유명해지면 더 멍청이가 되거든."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1919년에 40살이 되었다. 그 후 6년 동안 계속해서 양자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양자역학에 거부감을 표시하고, 결정론적인 특성이 강한 통일 이론을 만들려는 길고, 외로우며 결국에는 실패한 노력을 시작하면서 고집이 세졌던 것처럼 보인다.

 

마흐의 철학로부터 완전히 이탈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성공은 그에게 마흐의 회의주의가 불필요한 개념을 솎아내는 데에는 유용할 수 있지만,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성공은 부분적으로 그의 반항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구질서를 과감하게 뒤엎음으로써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장 이론이 과학의 확실성과 결정론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빠졌다. 스스로 구질서가 된 것이다.

 

운명은 권위에 저항했던 나를 벌하려고 나 자신을 권위로 만들었다.

 


<양자 역학>

그의 상대성 이론은 뉴턴 역학의 일부를 무너뜨리긴 했지만 모든 일이 정교한 인과 법칙에 의해 일어난다는 결정론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결정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이 주사위를 굴리는 것처럼 인과 없이 우연히 일어난다는 양자 역학의 메시지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전차 안에서 양자 역학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다. 보어의 기억에 따르면, "우리는 전차 안에서 너무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내릴 곳을 한참 지나쳤다. 우리는 다른 전차에 올랐는데 이번에도 다시 지나쳤다. 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우리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여러 차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한 번은 보어가 유명한 답변으로 받아쳤다. 

"아인슈타인 씨, 신에게 명령하지 마세요!"

 

그는 의외로 초기 양자 역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가 플랑크, 푸앵카레, 로렌츠의 아이디어를 그들 자신보다 더 쉽게 받아들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젊은 동료들이 그의 아이디어를 훨씬 더 쉽게 받아들였다.

 

하이젠베르크는 아인슈타인이 젊은 시절에 그랬듯이 관찰, 측정할 수 없는 개념을 배척하는 마흐의 철학을 받아들여, '전자 궤도'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7년에 그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는데, 전자가 우리가 관찰하기 전에는 명백한 위치나 경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그것이 관찰이나 측정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우주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우연, 비결정성, 확률이 확실성의 자리를 차지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아인슈타인에게, 그가 과거 1905년에 했던 말처럼, "물리학 이론에는 관찰할 수 있는 것만 들어있어야 한다"라고 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나도 그런 종류의 추론을 사용했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

  • 물체의 성질은 관찰, 측정 가능한 범위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
  • "근원적 진실"은 절대로 알 수 없다.
  • 현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절대 알아낼 수 없기 때문에 미래는 확률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

 

양자역학이 유효하다는 실험 결과들이 반복적으로 제시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양자 역학은 확실히 훌륭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목소리가 나에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이론은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우리를 악마의 비밀 가까이까지 데려가주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양자 역학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1927년 솔베이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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