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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독후감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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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에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 중에는 뉴욕 출신의 부유한 의약품 제조업자 리언 워터스도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지루해하는 것을 눈치챈 그는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을 건너서 담배를 권했고, 아인슈타인은 세 모금에 담배를 다 피워버렸다. 그 후에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훗날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서 뉴욕을 방문할 때는 워터스의 아파트에서 머물렀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으려고 "감정이 담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는 "이단자"가 그런 경우라고 말했다. 
 
"자신이 진심으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고, 열정적으로 정직한 사람에게는 두 배로 어려운 일입니다." 양자 역학에 대해서
 
"쉰 살이 지나면 누구나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런 모든 과정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유머는 변함이 없었다.
 
"조용한 생활의 단조로움이 창의적인 정신을 자극한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주장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은 고독한 추구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협력해서 일을 하면 훨씬 더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코펜하겐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양자역학 팀들은 서로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결실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돌파구는 베른의 특허사무소나 베를린 아파트의 다락방이나 등대에서 완성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어쩌면 가끔씩 고문이나 수학자 조수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평화주의의 종말>
훌륭한 과학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증거에 직면하면 자세를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흐의 실증주의를 버린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평화주의는 그의 확고한 개인적 원칙 중 하나였으나 1933년 초에 히틀러가 등장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군축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젊었더라면 군대에 갔을 것이라는 기막힌 주장도 했다.
 
☆☆☆☆☆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은 아인슈타인을 웃게 만들었다. 
과학자에게는 사실이 바뀌었을 때 자신의 주장을 바꾸는 것이 유약함의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미국>
아인슈타인은 신문과 아이스크림 콘을 원했다. 그래서 프린스턴의 호텔에서 투숙 절차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파이프를 피우면서 신문 판매대로 걸어가서 저녁 신문을 샀다. 그는 자신의 행방에 대한 보도를 보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볼티모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걸어가서, 엄지손가락으로 바로 전에 어린 신학부 학생이 샀던 아이스크림 콘을 가리킨 후에 다시 자신을 가리켰다. 그때는 영어를 못했다. 그냥 귀여워서 넣음 ㅋ
 
그는 가끔씩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생각에 잠겨서 방황하며,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머리를 잘 빗지도 않으며, 양말을 잘 신지 않는, 친절하고 점잖은 교수였다. 
 
이발과 머리 빗기를 싫어했던 그의 습관이 전염되어서 엘자, 마르고트, 마야도 모두 똑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다녔다. 

그는 친절했지만 냉담했고, 똑똑했지만 어리숙했다. 그는 지극히 정직했고,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순진했다. 그는 인류의 문제에 열정적인 관심을 보였고, 때로는 민족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는 우주적 진리와 세계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냉담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국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그는 언제나 그런 특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은 미국 국민들의 민주적 성향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이나 계급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는 미국에서도 '티네프'라고 이름 지은 자신의 목재 요트를 타는 것을 즐겼다. 
그는 바람에 따라 떠다니다가 바람이 잦아지면 노트에 방정식을 썼다.
"그는 하루 종일 그냥 떠다니기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참고로 티네프는 "쓰레기"라는 뜻이다 ㅋㅋ


그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친구가 비상용 선외 모터를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수영을 하지 못하는데도 절대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바람이 잦아진 곳에서 몇 시간을 지내는 것이 끔찍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게는 단순히 생각할 시간이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다 벗고 잤다고 함. "잠을 잘 때는 자연이 나를 만들어준 모습으로 잔다."
 
버뮤다로 간 아인슈타인 가족 일행은 총독에게 호텔을 추천받았지만 너무 거창하다고 느꼈다. 
그는 적당한 하숙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의 프린스턴 작업실에는 패러데이, 맥스웰, 뉴턴, 거기에 그의 새로운 영웅이 된 간디의 그림이 더해졌다. 
이제 그는 과학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도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프린스턴 연구소로 걸어서 출퇴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 도시의 유명한 매력이 되었다. 그는 집에 도착한 후에도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무의식 중에 연구소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면 언제나 듀카스가 나와 그를 집안으로 데려갔다.
 
아인슈타인의 산만한 행동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멍한 교수의 이미지는 그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점점 더 강화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공개적으로도 그런 역할을 좋아했고, 이웃들도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기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꾸며낸 이야기가 그렇듯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은 어느 만찬에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노트를 꺼내놓고 식을 적어나간 적이 있었다. 다른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듀카스가 그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알려주었다. 그는 일어나 사람들이 박수치는 모습을 보고 기꺼이 동참했다. 듀카스는 그에게 다가가서 기립박수가 그를 위한 것이라고 알려주어야만 했다. 


<엘자의 죽음>
엘자가 병 때문에 침대에서 못 움직이게 되고 난 후, 그는 가끔씩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기는 했지만, 자신의 연구에 더 몰두했다. 
"내가 연구를 계속할 수만 있으면, 나는 불평할 필요도 없고, 불평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연구는 인생에 의미를 주는 유일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나름의 방법이었고, 엘자도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내 병 때문에 많이 당황한 것 같아. 그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방황하고 있지. 그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지 몰랐어.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해 줘."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죽음으로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정말로 울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형적으로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결혼 전에 아인슈타인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들은 달콤한 애정 표시로 가득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표현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는 가끔씩 과민했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다른 여성들을 희롱하거나 그 이상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동반자 관계로 진화한 사랑에는 외부의 관찰자들이 볼 수 없는 깊이가 있는 법이다. 그들의 관계는 낭만적이지는 않았지만 단단했다. 그들은 서로의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켜 주면서 더욱 단단해졌고, 진실했으며, 양방향으로 작용했다.

엘자


<실재>
양자 역학을 공격하기 위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상식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근거로 했다. 그러나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자연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개발하면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시간에 대한 일반화된 상식을 무너뜨렸고,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는 양자역학도 비슷하다. 양자역학은 입자들이 우리가 관찰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정확한 상태에 있지 않고, 두 입자들은 서로 얽혀 있어서 하나에 대한 관찰이 순간적으로 다른 것의 성질을 결정하도록 해준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관찰이라도 이루어지기만 하면 시스템은 곧바로 고정된 상태로 가게 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결코 그런 주장을 현실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자 역학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은 결국 실재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이 존재하는가?
 
이런 가정을 해보자. 우주에 X라는 물체가 있는데, 그 어떤 실험으로도 X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하자. 분명히 존재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X는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공간의 다른 부분에 존재하는 것이 스스로 독립적이고 현실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포기한다면, 물리학이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2부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과학에 대해 어느 정도 종교적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실재의 이성적 본질과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신뢰를 '종교적'이라는 말보다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런 느낌이 사라지면, 과학은 어리석은 경험주의로 퇴보해 버린다."
 
그러나 통일장 이론에 대한 그들의 작업에는 진전이 없었다.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인펠트와 호프만이 의기소침해진 때도 있었다. 호프만은 "아인슈타인의 용기가 꺾이거나 그의 창조성이 약해진 적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활기찬 토론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묘한 영어로 조용히 '내가 좀 더 생각을 해보겠다'라고 중얼거렸다"고 기억했다. 방안은 조용해지고, 아인슈타인은 느린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거나 맴돌면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표정은 꿈을 꾸는 것처럼 멍했지만, 내적 평온함이 느껴졌다. 긴장의 흔적은 없었다. 걸으러 드러나는 강렬한 집중의 징조도 없었다." 몇 분 후에 그는 갑자기 "얼굴에 웃음을 띠고, 문제에 대한 답을 쏟아내면서" 세상으로 돌아왔다.
 
인펠트 왈, "몇 년 동안 같은 문제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그의 끈기가 아인슈타인 천재성의 대표적인 특징"

레오폴트 인펠트


<학문적 몰락 2>
1930년대에 들어서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새로운 기본 입자들이 발견되었고, 그의 통일장에 대한 꿈은 멀어져만 갔다. 
친구였던 볼프강 파울리 왈, "신께서 흩트려놓은 것을 인간이 꿰어 맞추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과거 성공은 부분적으로 바탕이 되는 물리학적 실재의 냄새를 맡아내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광속의 일정함과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동등성 등을 포함한 모든 운동의 상대성이 가진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능력 덕분에 물리학에 대한 직관을 근거로 이론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훗날에 그는 일반상대성의 장 방정식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전력질주를 인도해 준 수학적 형식주의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이제 통일 이론에는 그를 인도해 주는 근본적인 통찰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세계주의자>
아인슈타인은 그동안 자신의 이름을 여러 단체에 너무나 쉽게 빌려주었던 덕분에, 종종 공산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고,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원자탄과 관련된 영화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거절했지만, 시나리오 작가 샘 막스는 끈질기게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얼굴에 철판 깔고 밀어붙이면 웬만하면 다 됨. 스티브 잡스의 방식
 
윌리엄 골든은 아인슈타인이 세계 정치에 대해서는 너무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라고 느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정부에 대한 생각이 현실적이 아니라면,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대량학살이라는 단 한 가지의 현실적인 견해가 있을 뿐이다."
 
그의 과학적 돌파구의 경우에서처럼, 아인슈타인의 접근은 다른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고착화된 가정을 포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수백 년 동안의 질서를 초월하는 방식을 주장하는 것은 독행자 사상가의 작품인 극단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지극히 극단적으로 보이던 아인슈타인의 많은 아이디어들은 일단 받아들여지고 나서는 훨씬 덜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물리학자들은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의 방정식을 정리하거나 타협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정치가가 되지 못한다.
 
냉전 시대에 그는 소련을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고, 그들의 강압적인 정책에 대해서도 그랬기 때문에, 소련 지지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어쨌든 교육, 보건, 사회보장, 경제 분야에서 소련의 성과는 상당했고, 국민 전체가 그런 성과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 과학자들과 대결하는 것이 즐거웠다.
 
아인슈타인은 자유로운 표현과 독립적인 생각을 용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핵심 가치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는 개인적, 정치적, 직업적으로 어떠한 제한에도 거부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