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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사설

知彼知己百戰不殆

나는 외부 자극에 의한 감정을 거의 안 느끼는 편이다. 가까운 사람이 슬퍼하고 있어도 지구 반대편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슬픔을 보는 것처럼 감정의 동요가 적은 편. 

 

그런데 '감정'의 반대는 '이성'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무의식적인 욕구와의 싸움에서 처참한 승률을 기록해 왔다. 감정적인 사람은 아닌데 이성적인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문득 일론 머스크가 떠올랐다(사실 고민을 할 때면 머스크는 어떻게 할까?부터 떠올리기에 문득은 아니지만). 머스크는 어릴 적에 '어둠'은 '가시광선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안 직후부터 어둠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애들은 귀신을 무서워할 때 말이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시나몬 토스트 크런치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느낄 정도로 커피와 다이어트 콜라를 자주 마신다. 또한 운동은 최대한 안 하고 싶다고 했으며, 그런 것을 하면서 오래 살 바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일찍 죽는 게 낫다고 말한 적도 있다.

 

여기서 내 상황과 비슷한 점을 느꼈다.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그렇게나 냉철한데, 왜 건강에 안 좋은 것을 계속 하지? 커피는 피곤을 가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쳐도, 콜라는 분명히 맛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백해무익한 것인데, 왜 저렇게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 참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을 조금 해봤더니, 뭔가 알 것 같았다. 머스크는 단지 욕구를 참지 못 한 것이 아니라 조금의 건강과 쾌락의 trade-off에 타협한 것일 뿐이었다.

 

내 첫 번째 실수는 지금까지 내 욕구를 '절대 악'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정치가들의 공격처럼, 채식주의자의 자기세뇌처럼. 내 욕구 중 몇몇은 분명히 백해무익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에게 '쾌락'을 주었고, 내 무의식이 그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으며, 분명한 '보상'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분명히 위태롭지 않을 것인데, 나는 내 욕구들을 '무조건 피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실수는 '해탈'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나는 야한 것을 봐도 성욕이 생기지 않고, 달고 짠 음식에 '전혀' 현혹되지 않으며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기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를 선택하는 그러한 궁극적인 정신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지 못한 자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덤.

 

하지만 아무리 속세를 떠나 수련한 자도 성욕이 생기고, 아무리 몸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아무리 절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한들 유혹을 참는 것일 뿐, 유혹을 해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생기지 않는 '해탈'에 이르는 것은 그 누구라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적도, 나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결국에 내가 해야 했던 것은 욕구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협상'의 대상으로 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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